월출산 벚꽃 백 리 길(54)
■ 군서면 월곡리 1구 월암마을(3)

300년 된 월암마을 함양 박씨 입향조 고택 전경. 현재 8대손인 박석구 씨가 거주하고 있다. 고택 안에 걸린 박씨의 자작시 ‘나의 하느님’이 눈길을 끈다.(오른쪽 작은 사진)
300년 된 월암마을 함양 박씨 입향조 고택 전경. 현재 8대손인 박석구 씨가 거주하고 있다. 고택 안에 걸린 박씨의 자작시 ‘나의 하느님’이 눈길을 끈다.(오른쪽 작은 사진)

월암마을의 생명수용식등 공동우물

마을 입구를 지나 논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길가에 원두막이 하나 있다. 그 곁에 공동우물이 있다. 박재영 씨는 그 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자라 등거리에서 물이 솟구친다고 해서 용식등이라고 한다. 모래 위로 물이 솟구쳐 나왔다. 지하수나 상수도 개발이 안 되고 그럴 때는 월산·월암 주민들이 그 물을 길러다 먹었다. 수량이 엄청나게 풍부했다. 겨울에는 물이 따뜻하여 김이 나고, 여름에는 발을 못 담글 정도로 시원했다. 초수동 계곡물처럼 겨울에 따숩고 여름에 시원했다. 옛날에는 겨울에 목욕이라는 것이 없었다. 설 명절 때나 포로시 한 번 목욕을 했었다. 우리 월암마을 주민들은 설날을 앞두고 짚을 한 뭇씩 가지고 용식등 샘가로 가서 목욕을 했다.”

왜 짚을 들고 갑니까?”

동네 공동우물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은 야외 활동을 뜻하는 것 아닌가. 바깥 날씨가 추우니까 불을 지펴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아무튼 그 용식등은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생명수였다. 지금은 상수도가 들어와서 우물터만 남아 있다. 하지만 물은 계속 나온다. 그 샘을 복원하여 빨래터로 이용할 계획도 세웠지만 결국 추진하지 못했다.”

월암마을 소지명(小地名)

어느 마을이나 그 동네 사람들끼리만 부르는 암호 같은 지명이 있다. 월암리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민 이동진(67) 씨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동네의 소지명(小地名)을 노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을 잊어먹기 전에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노트에 적힌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통신박골(평지 부근), 산판(펜션 가는 길), 간난쟁이(큰 감나무가 있던 곳), 장성갈(군서 양수장 부근 냇가), 몰무덤(말무덤), 잔등, 작숯골, 무네미, 동백골, 상치바위, 영골, 남살말, 대팽이(추석바위) 등의 소지명이 있다.

그리고 노트에는 마을 뒤편 골짜기와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연결하여 설명해 놓은 부분도 있었다.

초수동 원앙골 상치바위/ 영골 작숯골 고지봉 대밭골 생기산/

무네미 삼각산 동백골/ 대팽이 배암골 성적골 - 구먹봉

 

이것은 박재영 씨가 설명해준 내용과도 일치한다. 동네 어른들 말을 들어보면 뒷산 골짜기마다 절이 있었다고 한다. 월출산에 99개의 절이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100개가 되었으면 영암이 아주 크게 될 뻔했다는 말을 동네 어른들이 자주 했었다고 한다.

몰무덤

월암마을 소지명 가운데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몰무덤이다. 몰은 말()을 뜻하는 옛말이다. 따라서 몰무덤은 말무덤을 뜻한다. 이동진 씨 노트에는 이 몰무덤이 엄성수 씨 뒤뜰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재영 씨도 지난번에 만났을 때 몰무덤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특히나 마산리는 말을 기르던 곳이고, 성지촌(쇠지네)는 쇠를 다스려 무기를 생산해 낸 곳이고, 월암리는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말무덤을 뜻하는 소지명이 버젓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상관이 있어 보인다.

도포면 원목리에도 몰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 마을에는 말이 나온 곳이라는 뜻말난굴이란 지명도 있다. 영암에서 아기장수 설화가 온전하게 전해오는 유일한 마을이다. 혹시 월암마을에도 그와 비슷한 아기장수 설화가 남아 있는지 궁금하여 박재영 씨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바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젊은 시절에 동네 어른들이 가끔씩 불러다 놓고 우리 마을 유래와 역사 문화에 대해서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뭘 잘 모르는 때라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렸다. 그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지금에서야 후회가 된다. 그때 더 잘 귀담아듣고 꼼꼼하게 기록을 해놓았어야 했다. 이제는 마을의 역사를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도 알 길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월암마을 종택

박재영 씨의 소개로 박석구(67) 씨를 만나 월암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았다. 이동진 씨와 죽마고우라고 했다. 그가 사는 곳은 마을 한복판인데 집터가 굉장히 넓다. 마당에 들어서면 다섯 칸 한옥이 손님을 반긴다. 목재가 크지 않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문미(門楣)에는 송운청장(宋雲靑莊)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고 벽에는 수묵화와 시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집주인이 직접 쓴 시를 나무판에 각하여 걸어놓은 것이다.

나의 하느님

박석구

나에게 하느님이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무엇을 도와달라는 의지체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지고
가꾸었던 작물이
하늘과 바람과 비로 인하여 잘 되어

몸과 마음이 뿌듯해질 때,
그것이 나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보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준
그 누군가이다

월암마을 지명 유래

박석구 씨는 입향조의 8대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입향조가 이 터를 잡은 지 3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부터는 광주에 나가 살다가 7년 전 은퇴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문미에 걸려있는 송운청장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송운(松雲)은 부친의 호()고 서예가 만석이 써준 글씨라고 한다. ‘송운이 사는 푸른 집(별장)’ 정도로 이해했다.

인사를 나눈 후에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제비 두 마리가 처마 밑에 지어놓은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들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박석구 씨는 선친 박형재 선생이 월암마을 유래에 대해서 직접 써놓은 글을 보여주었다.

우리 마을은 월악의 서쪽 선인봉 하에 자리를 잡고 있다. 1700년대 중반경 함양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아 점차 입주하기 시작하여 20여 가구로 자작일촌을 이루고 거주하여 오던 중 경주 이씨 외에 몇몇 성씨가 입주하여 현재는 4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처음부터 미맥 위주의 농사를 경영하고 있는 마을이다.

뒷산 초수동에 있는 월암사지의 명칭을 인용하여 월암이라 명명하였고, 마을 앞 정자나무 옆의 다리를 월암교라 이름하였다.”

/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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