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8)
군서면 월곡3구 호동마을(3)

호동마을 고인돌 떼 나군. 벚나무 가로수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인다.
호동마을 고인돌 떼 나군. 벚나무 가로수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인다.

솟을대문 앞에 있는 위인재기를 읽고 난 후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날아갈 듯 처마를 펼친 팔작지붕의 4칸 한옥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찬찬히 살펴보니 위인재 건물 기둥에 총 12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특이하게 정면 기둥뿐만 아니라 좌우 측면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있다.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토방 앞에 주련을 해석해놓은 설명판을 설치해 놓았다. 이렇게 집을 지은 동기를 밝히는 문장과 주련을 한글로 해석해놓은 문중을 찾아보기 힘들다. 천안전씨 문중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주련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위인재 재실을 건축하던 당시의 사람들이 조상을 흠모하고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자긍심과 후손들이 선조들의 가업을 잘 이어주기를 바라는 기대와 염원으로 가득 차 있다.

위인재(爲人齋) 주련(柱聯)
秀麗山明洞府開(수려산명동부개) 
靑山綠水好爲隣(청산녹수호위린)
滿天風雨何須間(만천풍우하수간)
花樹千枝蘭漫春(화수천지란만춘)
經營終始輸誠力(경영종시수성력)
新齋翼然淨無埃(신재익연정무애)
先祖分明多德業(선조분명다덕업)
孱孫追募日逾新(잔손추모일유신)
白髮時時扶杖到(백발시시부장도)
靑年日日挾書來(청년일일협서래)
豈可尋常設酒盃(기가심상설주배)
古禮分明在此哉(고예분명재차재)

자연의 경치 아름다운 이곳에 마을이 활짝 열렸으니
산은 푸르고 물은 맑아 이웃이 모두 아름답게 모여있네
하늘에 가득했던 비바람은 잠깐 머물다 가고
천 가지 꽃나무에 봄빛이 한창 풍성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잘 건축하는데 정성과 힘을 다 쏟았으니
새 위인재가 날개를 편 듯 티끌 하나 없이 깨끗도 하네
선조가 분명하게 어진 덕과 공로가 많으셨으니
나약한 후손들의 선조를 사모함이 날마다 넘치네
백발 노인이 가끔씩 지팡이 짚고 이곳을 찾아오고
젊은이도 날마다 책을 끼고 오는데
예사로운 풍류 잔치를 어찌 베풀지 않으리
옛날의 예와 도가 분명히 이곳에 있네.

주련을 다 읽고 위인재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백발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풍류 잔치를 벌이고 옛날의 예와 도를 논하고 학문을 닦던 그 당시 풍경은 어디로 가고 툇마루엔 먼지가 가득하여 사람이 머물다 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호동마을에서 가장 빛나던 건물 위인재는 이제 현대식 전원주택에 밀려 외로운 섬처럼 혼자서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호 통제로다. 이제 누가 있어 저 조상들의 얼과 뜻이 담긴 고택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호동마을 고인돌 떼

회의촌, 녹암마을, 주암마을, 오산마을에 이어 호동마을에도 역시나 청동기 유물인 고인돌이 여러 기 존재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영암읍에서 삼호까지 해안가 구릉을 따라 고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흔적으로 보인다. ‘디지털 영암문화대전’을 살펴보면 호동마을 고인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월곡리(月谷里) 호동(虎洞) 고인돌 떼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호동 마을 세 곳에 분포한다. 가군은 호동 마을 전동일의 집 뒤뜰에 2기가 있다. 나군은 영암~구림 간 지방 도로에서 호동 주유소 약 50m 못 가서 호동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따라 약 20m 떨어진 좌측 논에 6기가 있다. 다군은 호동 주유소 우측의 야산에 12기가 있다.

가군은 집 뒤뜰에 2기가 있다. 

나군은 논에 6기가 동서 방향 2열을 이루고 있다. 2기의 고인돌에서는 2개의 받침돌이 확인되지만 나머지는 논에 매몰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인돌의 규모는 길이 475㎝, 폭 310㎝, 두께 100㎝로, 형태는 타원형이고 받침돌 2개가 보인다. 

다군은 호동 마을 간이 정류장 뒤편 야산에 남북 2열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큰 고인돌에서 받침돌 1개가 확인되었다. 가장 큰 고인돌의 규모는 길이 500㎝, 폭 360㎝, 두께 90㎝ 정도이며, 형태는 부정형으로 받침돌 1개가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가군은 호동 마을 정동일의 집 뒤뜰에 있으며, 1호 고인돌은 하부가 잡석으로 메워져 있고, 상면 중앙부에는 구멍이 있는데 옛날에 집의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호 고인돌을 범바위(虎巖)라고 부르고 있다. 

2호 고인돌은 파괴되어 이동된 듯하며 마을에서는 개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나군은 1975년 최몽룡 교수가 조사할 때 10기였으나 2013년 현재 6기만 2열로 열 지어 있다. 2기의 고인돌에서 받침돌이 확인되지만 나머지 덮개돌은 논에 매몰되어 있다. 

다군은 1999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조사에서는 14기로 보고되었으나, 천안 김씨의 집단 묘역 조성으로 대부분 이동되었으며 현재 12기만 남아 있다. 또한 월곡리 호동 고인돌 떼는 ‘월곡리 호동 지석묘’로도 불린다.”

필자가 답사한 바로는 가군에 속한 고인돌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마을 체험관을 지으면서 동네 사람들은 범바위라고 부르는 1호 고인돌을 체험관 앞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나군에 속한 고인돌 떼는 현재 6기가 논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벚꽃 가로수 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누구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다군에 속하는 야산 속 고인돌 떼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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