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8)
군서면 월곡3구 호동마을(2)

위인재 전경  호동마을 / 천안전씨 문각인 위인재(爲仁齋)가 마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위인재 전경  호동마을 / 천안전씨 문각인 위인재(爲仁齋)가 마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호동마을은 벚나무 가로수 길에서 월출산 방향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을 표지석을 지나 200여 m 정도 안길로 들어가면 보물처럼 숨겨진 마을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우람한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 왼편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고, 오른편에는 솟을대문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솟을대문 앞에 안내판이 한 개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호동마을 천안전씨 문각인 위인재기(爲仁齋記)를 한글로 풀어 음각해 놓은 해설판이다. 호동마을 이장 전의성 씨에 의하면 엄길마을이 큰 집이고 호동마을은 작은 집에 해당한다고 한다. “어른들이 계실 때에는 항상 사람들로 들끓고 집 관리도 잘 되었는데 지금은 거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 환경 정리도 하고 목재에 칠도 하고 문각 관리에 더 신경을 쓸 계획입니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정면 4칸 팔작지붕의 한옥이 나그네를 반긴다. 기둥마다 주련이 걸렸는데, 양 측면 기둥과 툇마루 안쪽 기둥에까지 주련이 걸려있다. 집 안에는 위인재기와 원운(元韻) 시(詩) 한 편과 차운(次韻) 시 3편이 서각되어 걸려 있다. 문중에서 이 집을 지을 때 조상들의 얼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위인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위인재기(爲仁齋記)

“월출산 밑 호동이라는 마을에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듯한 재실이 있고 현판에는 “爲仁齋”가 걸려 있으니,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효제(孝悌)는 인(仁)을 행(行)한 근본이라는 뜻이다. 전씨(全氏)의 선조를 추모하는 재실이며 겸하여 청년과 영재들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전씨가 이 터를 잡은 이의 휘는 극홍이 처음이었다. 천안전씨는 우리나라에서 융성한 씨족이다. 판서공(判書公) 휘 사민의 지극한 자취가 그 팔대 손의 형제에게까지 미쳐 몽일, 몽성, 몽진, 몽태 네 분 현인의 효행과 학덕이 함께 아름답게 빛났었던 바, 임진왜란 때 섬 오랑캐의 난리로 종묘사직의 안위가 조석에 달렸을 때, 성현의 가르침에도 있는 것과 같이 인(仁)을 해(害)치는 곳에서 삶을 구하고자 함이 없어야 하므로, 내 몸은 죽더라도 인(仁)을 이루어야 하겠다 하고, 쥐 같이 살 구멍을 찾아 도망쳐 숨어 버리지 아니하고 눈을 부릅뜨고 돌격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으며, 자신 또한 창에 찔려 몽성 공이 죽으니 병조판서를 증하였고, 몽태 공에게는 병조참의를 증하였으며, 임분항의 위국연생(臨氛抗義 爲國捐生)(재앙에 임해서는 의를 위하여 항거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림)이라는 여덟 글자로 포양(褒揚)하였으며 과연 이는 충(忠)과 효(孝)가 두 가지 이치가 아니고 효도는 반드시 충에서 오고, 충성(忠誠) 또한 효에서 반드시 나온다는 이치인 것이다.

참이 공의 현손(玄孫) 명보는 그 조상의 업적을 이어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하며 몇 번이나 실신을 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이지 아니하였다. 계모 이씨(李氏)를 정성껏 섬기고자 하였으나 혹 어느 때인가 생각해보니 아버지께서 뵙기를 드물게 하시며 비탈진 외딴집 별채 방에 거처토록 하시고 식음을 급하게 하시니 공이 오동 잎에 밥과 찬을 싸 매양 끼니에 정성껏 공양하였으나 가을이 되어 오동 잎이 다 떨어져 없으므로 오동나무를 보듬고 호곡을 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오동 잎이 다시 피어나 밥과 찬을 싸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와 같이 근천지효(根天之孝)는 신명(神明)이 감동한 일로 오나라 맹종의 눈 속 죽순과 위나라 왕상의 얼음 위 잉어와 같이 구해진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마음을 돌리시고 부부간에 정이 이어지니 온 집안이 화락(和樂)하므로 그때 사람들이 청하기를 오동 밑 효자라 하므로 호(號)를 오재(梧齋)라 하였다.

효도란 사람이 행해야 할 백 가지 행실의 근원이 되므로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행위인데도 심지어는 다른 얼굴을 하는 이가 많으며 어버이들이 그러하지 못하였으니 순(舜)임금이나 민자건(閔子騫)의 효행이 더욱 아름답게 만세(萬世)에 나타나는 것이다. 계모가 돌아가시니 오동나무를 보듬고 울었으며,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도 몹시 슬퍼하여 뼈만 남도록 바짝 마르고 여위었으며, 3년을 시묘하였으므로 고종 9년 신미(辛未)(1871)에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증하였으며, 송하 기우만 선생과 면암 최익현 선생이 깊숙이 묻혀있던 그 극진한 윗대와 아랫대의 극충(極忠)과 지효(至孝)를 밝혀 백 대에 국가의 표준으로 삼아 정려를 세워 숭모(崇慕)(우러러 사모함)케 하고 사람들은 사우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하물며 그 후손들로서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정성이 어찌 깊지 아니하리오.

이제 경오년(庚午年)에 이르러 재사(齋舍)를 지을 것을 의논하여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자금을 모으고 공인(工人)들을 불러 힘을 쏟아 몇 달이 못되어 재실(齋室)을 지으니 질서가 정연하므로 우측으로는 솔(松)을 심고 좌측으로는 대(竹)을 심으니 굉장하게 크고 산뜻하며, 선명하여 실로 한 고을에서도 웅대하고 경치가 좋아, 가히 선조를 숭모하고 후손들에게 복을 끼치는 참된 충효의 집안에 어진 후손들의 사업이었다. 지금 세상에 사학이 횡횡하고 질서가 없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무너져 선조나 조상의 추모하거나 생각하기를 쓸데없는 일로 여겨, 예의가 몰락해 가는 이때 전씨일문(全氏一門)에서는 이륜을 부식(扶植)하여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니 이 같은 행위를 서로 좇아 땅속에 폭약같이 생각하여 양맥(陽脈)이 암동(暗動)하여 더더욱 자라기가 반드시 전씨(全氏)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후손 동수옹(東洙翁)이 머리가 센 노인이나 오백여 리 먼 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나에게 찾아와 그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어찌 그 징을 책하는데 모기가 태산을 지는 힘든 일이 아니오마는 그러나 그 성근에 감동되어 졸렬한 것을 잊고 이와 같이 쓰며 병필 군자의 때를 벗기고 닦아 광채를 내주기를 기대한다. 

단군기원(檀君紀元) 4313년 경신(1980년) 3월 16일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삼가 지음

주) 민자건(閔子騫)은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였다. 순임금과 더불어 중국 8대 효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 계모가 민자건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친아들만 사랑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계모는 민자건에게 갈대로 채운 옷을 입히고 심부름을 보냈다. 민자건은 가는 도중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그냥 돌아와야 했다. 이를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민자건에게 물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 엄마가 너에게 그 갈대 옷을 입혀 내보냈단 말이냐?”

이 일로 인해 계모는 쫓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민자건은 쫓겨난 계모와 그 아들이 고생하며 산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계모가 다시 들어와 살도록 하였다. 계모는 민자건의 효심에 깊이 감동하여 개과천선하였다. 계모는 이후 자신의 아들과 민자건을 똑같이 사랑하였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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