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교에서 바라본 원해창마을 / 모습 고려 때부터 영암의 해로 입구로, 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해창(海倉)이라 하였다.
해창교에서 바라본 원해창마을 / 모습 고려 때부터 영암의 해로 입구로, 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해창(海倉)이라 하였다.
 원해창마을 앞으로 흐르는 덕진강과 간척지 / 영산호 하굿둑 건설 이전에는 물길을 따라 수많은 어선을 비롯 여객선, 화물선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해창 포구는 영암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진·장흥 사람들까지도 애용했던 번창한 포구였다.
 원해창마을 앞으로 흐르는 덕진강과 간척지 / 영산호 하굿둑 건설 이전에는 물길을 따라 수많은 어선을 비롯 여객선, 화물선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해창 포구는 영암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진·장흥 사람들까지도 애용했던 번창한 포구였다.

신흥마을에서 나와 서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월출산온천관광호텔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면 곧바로 한국농어촌공사 군서양수장이 보인다. 군서양수장은 영산호 물을 농업용수로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양수장을 지나면 원해창 삼거리가 나온다. 남쪽으로 가면 신덕정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해창교를 지나 도포로 이어진다. 이 삼거리를 중심으로 30여호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기가 바로 해창리 2구인 원해창마을이다. 원래 영암군 서시면(西始面)의 지역이었으며, 조세 창고가 있는 관계로 창말, 창촌, 해창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모가정(毛加亭), 신덕정(新德亭), 도화정(桃花亭) 등과 함께 군서면에 편입되었다. 지리적으로 군서면 동북쪽 끝에 있으며 북동쪽으로 덕진강을 경계로 도포면과 접하고, 동쪽은 송평리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군서면 도장리와 경계를 이룬다. 

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 해창(海倉)

고려 때부터 영암의 해로 입구로 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해창(海倉)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 영암군 조를 보면 영암에는 모두 4곳에 해창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며, 현재의 해창 마을도 그 중 하나이다. 해창 마을은 영암읍에서 15리에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목포로 가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원조 해창이었던 망호리 배날리

한편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원래 망호리 배널리 포구를 원해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망호리 배널리 포구는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며, 원해창 또는 구해창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12대 조창, 즉 장흥창이 설치된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는 부춘정 동쪽 건너편으로 비정되며, 속칭 ‘뱃마테’ 또는 ‘배나테’라고도 하였다. 바다였을 당시에 갯고랑이 망호리 배널리 포구와 부춘정 앞을 돌아 흘렀으며, 일제 강점기에 이 갯고랑으로 목포를 왕래하는 영암호가 다니기도 하였다. 구 해창의 건너편 부춘정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된 정미소와 조곡 창고가 있었으며, 현재는 축사로 이용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배널리 포구에는 대동미 등을 실어 나르는 영암 해창이 설치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이고, ‘영암읍지’(靈巖邑誌)에서도 “해창(海倉)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부춘정 앞 배널리를 말하는 것으로, 배널리는 영암읍과 직선으로 약 2㎞에 있어 기록과 일치한다. 

배널리는 배나루의 와음(訛音)에서 유래한다. [형성 및 변천] 고려 이전에는 신포(薪浦)라고 하였으나 고려 전기에 조동포(潮東浦)로 개칭하고, 고려 12대 조창인 영암군 장흥창(長興倉)을 두었던 곳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분명한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고적 조의 “고장흥창(古長興倉)은 군(郡)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土城)의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다른 고적과는 다르게 별도의 거리를 명기하지 않고 ‘재군’(在郡)이라 한 것으로 보아 군 소재지 인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 섬을 싣는 초마선(哨馬船)의 뱃길로 보아 포구는 영암읍 북쪽 망호리 배널리 포구로 볼 수 있다. 인근에서 토성의 흔적도 약하게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망호리 배널리 포구에는 대동미 등을 실어 나르는 영암 해창이 설치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항의 기능을 하였다. 

한때 목포를 왕래하던 객선(客船)이 다니기도 하였으나 해저의 퇴적으로 수심이 낮아지면서 큰 배인 짐배의 운항이 어려워지자 군서면 해창으로 이동되고 작은 배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배널리 포구는 1980년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바닷물이 차단되면서 포구 기능을 상실하였다.”

고문헌에 기록된 망호리 배널리 해창

여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원래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장흥창은 군에 있었으며, 고려 초기에 설치하여 인근 군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한 12대 조창으로 지금은 토성의 터가 있다(古長興倉 在郡 高麗初設倉 收附近州縣租稅漕 至京 卽十二倉之一 今有土城基址).”[동국여지지-고적 조] 

“해창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海倉在邑北邊五里)”[여지도서-창고 조] 

“해창(海倉)은 읍의 북변 5리에 있다”[영암읍지-창고 조]

“벼[元米], 콩[太], 대동미 등을 해마다 풍작 흉작에 따라 혹 더 걷거나 감하여 1월에 창고를 열어 2월까지 영암 해창에서 거두어 출발한 세곡선은 영산강을 따라 목포, 영광 법성, 충청도 원산 영종포를 거쳐서 한양의 광흥창에 도달하였는데, 총 20일이 소요되었다.”[여지도서]

강진·장흥 사람들 해창포구 이용 

원해창마을은 덕진강 남쪽에 자리한 포구였다.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까지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했으며, 바닷가에는 영암군 농산물 집하장으로 조세 창고가 있었다. 목포로 가는 주요 해양 통로로 여객선과 화물선이 쉴 틈 없이 드나드는 중요한 항구여서 하루에도 많은 배들이 들고 났다. 옛날에는 강진과 장흥에 사는 사람들도 목포로 가기 위해서 월출산 불치재를 넘어 이곳 해창까지 와서 배를 탔다고 한다. 육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때에는 해로가 곧 지금의 고속도로였다. 강진·장흥에서 배를 타고 목포까지 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 울둘목을 거쳐야 목포에 도착하는데 영암 뱃길과 비교해보면 빙 돌아서 가는 해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해창, 신덕정, 도장리, 목화정, 신흥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영산호 하굿둑을 막기 전 끝없이 펼쳐진 개펄과 넘실대는 강물이 출렁이던 시절의 향수를 이야기한다. 전남 최고의 항구도시 중 하나인 목포를 가기 위해서는 영암읍에서 가까운 원해창 포구가 유일한 해상통로였으므로 여객선이나 화물선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큰 배들은 수심이 얕은 해창 나룻터에 근접 운행을 할 수 없었으므로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었고, 작은 발동기선들이 사람이나 화물을 대기하고 있는 큰 배로 실어다 주었다고 한다.

원해창 삼거리 식당의 쇠락

원해창 삼거리는 영산강 물이 들고나던 시절에 장어, 운저리, 짱뚱어 등 해산물을 요리하여 파는 식당들이 즐비했었다. 영암 맛집이 운집해 있는 지역으로 제법 이름이 났었다. 그러나 현재는 제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해산물도 나오지 않거니와 식당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지나치게 고령화되어 더 이상 운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창교 위에서 바라보니 이젠 조그마한 하천이 되어버린 덕진강 주변에 비쩍 마른 갈대들만 해창포구의 옛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운 겨울바람에 무심하게 서걱거리고 있었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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