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6)
■ 군서면 해창리 신흥마을

신흥마을 전경 게의 형상을 따서 게등(嶝)(일명 기등)으로 불렸던 신흥마을은 영산호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영산강 물이 망호리, 덕진다리 앞까지 흘러 돛단배와 통통배가 오가던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영산호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너른 들판이 생겨났다. 마을 뒤로 월출산온천관광호텔이 보이지만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았다..          
신흥마을 전경 게의 형상을 따서 게등(嶝)(일명 기등)으로 불렸던 신흥마을은 영산호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영산강 물이 망호리, 덕진다리 앞까지 흘러 돛단배와 통통배가 오가던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영산호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너른 들판이 생겨났다. 마을 뒤로 월출산온천관광호텔이 보이지만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았다..          

목화정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그마한 재를 하나 넘으면 언덕을 등지고 수십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해창리 4구 신흥마을이다.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런지 동네 골목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회관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마을회관 바로 앞에는 신흥마을의 지명유래가 간략하게 새겨진 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0년대에 이루어진 작은 동리(洞里)로 원래는 바다에 기어 다니는 게의 형상이라 하여 게등(嶝)(일명 기등)이라 하다가 마을 이름을 새로 번창할 것이라는 뜻의 신흥(新興)이라 개명하였다. 현재 김해김씨 외 박씨, 이씨 등 약 35호의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회관 준공비문을 읽고 있는데 마침 마을회관에서 주민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군서 모정마을에 사는 김 아무개라고 합니다. 영암의 여러 마을을 답사하면서 그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기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혹시 신흥마을 이장님이 안에 계신가요?”“지금 이장이 어디로 출타 중이어서 마을에 없을게요. 무슨 일로 그리하시오?”“신흥마을의 역사, 문화, 전설 등을 기록한 문헌이나 책자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글쎄요. 내가 알기로는 없는 걸로 아요만...”동네 주민과의 대화를 마치고 마을을 더 둘러보았다. 큰길로 나가니 마을 언저리에 우뚝 솟은 큰 건물 하나가 보인다. 월출산온천관광호텔이다. 외딴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큰 건물이다. 마을 앞 도로는 영암읍에서 신흥 원해창을 지나 도포로 통하는 길이다. 도로 건너편에는 제법 너른 들이 북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영산호 막기 전에는 개펄이었던 곳이다. 영산강 물이 영암읍 망호리, 덕진 영보리 앞까지 출입하면서 돛단배와 통통배가 오가던 어촌이었는데 영산호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간척지가 생겨났다.

기등에서 신흥(新興)으로

신흥마을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상엄(金相嚴)이 1890년대 말부터 1900년 초에 신덕정(新德亭) 앞의 달아래 영산강 개펄을 막을 결심을 하고 주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일으켰다. 그 결과 꽤 너른 농지가 생겨나자 1900년대 초에 김상엄이 현재의 신흥(新興)마을에 터를 잡고 살림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흥마을의 원래 이름은 마을회관 준공기념비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기등(게등)이었다. 동네 모습이 게펄 위로 기어 다니는 게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 마을이 새로 흥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흥’(新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철새들의 낙원, 신흥마을 저수지

천태기 신흥마을 이장의 말을 들어보면 마을 앞에 상당히 큰 저수지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축조된 것인데 영산호 하굿둑을 막은 후에 간척지 물을 대기 위해서 농업 용수로를 건설하자 마을 저수지의 효용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저수지 둑을 헐어버렸다고 한다.

“영산호 막기 전 우리 신흥마을 저수지에는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 정도로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었지요. 가물치, 메기, 빠가사리, 붕어, 잉어, 장어 등 물고기 천지였습니다. 잡아먹을 물고기가 많으니까 고니, 청둥오리, 물오리 등 철새들이 새까맣게 날아와 저수지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겨울철에 철새들의 군무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지요. 영산호 농업용수로가 생겼다고 해도 만일 그 당시 저수지를 없애지 않고 보존했더라면, 지금 우리 신흥마을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태기 이장은 유소년기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소중한 것들이 너무 쉽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했던 그 시대에는 강과 바다를 막아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는 일이 절대 과제였다. ‘이밥에 괴기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서민들이 그토록 바라던 꿈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위정자들은 쌀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다. 대다수 국민도 동의했다. 천태기 이장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때 쌀 한 되 바꾸려면 맛이여 기여 조개여 한 다라이가 필요했지요. 낙지도 한 양판은 있어야 쌀 한 되박 바꾸어 갔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낙지 몇 마리면 20kg 쌀 한 포요.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기가 맥힌 세상이 되어부렀습니다. 만일 영산호 안 막고 도포·해창포·덕진포에 고기잡이 배들이 줄지어 오가고 있다면 지금 쌀농사 짓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강과 개펄에서 올리는 수익이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옛날에 신흥마을에도 어선이 많이 있었습니까?”“아니요, 우리 마을은 주로 개펄에서 해산물을 채취했습니다. 어선은 몇 척 없었습니다. 목화정마을 한점일 이장님의 부친께서 알아주는 어부셨지요. 그리고 원해창과 장사리 마을에 어선이 많았습니다.”“한점일 이장님도 20대 젊은 시절에 부친께 뱃일을 배워 통통배를 직접 몰고 다니면서 해남 화원반도부터 완도까지 바다를 누볐다고 자랑하시던데요. 대부분 돛단배를 달고 다닐 때 이 근방에서 제일 먼저 배에 엔진을 단 통통배를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 영암은 1980년 영산강 하굿둑을 완공함으로써 천지개벽이 된 셈이군요.”

“우리 동네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일제강점기 때 이미 영산강 하구언을 설치하고자 왜놈들이 기초 설계를 마쳤다고 합디다. 박정희 정권 때 시작해서 전두환 정권 초기에 완공했지만 실제 계획은 왜놈들이 했던 것이지요. 즈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쌀 증산에서 다 뺏어갈라고 했던 것이겠지요. 해창에서 물자 다 빼돌린 것 아닙니까?”“맞습니다. 목화정마을에서 생산된 목화도 왜놈들이 다 뺏어갔다고 합니다. 씨앗까지 뺏어가는 바람에 몰래 씨앗을 감추어 놓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황금보다 귀했던 쌀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특히 우리나라 찰진 땅에서 생산되는 쌀은 품질이 뛰어났다고 하니까요.”

영암 유일의 온천관광호텔 문 닫아

신흥마을은 영암 유일의 온천관광호텔이 있는 마을이다. 월출산국립공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암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7년에 지어졌다.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지하 600m에서 솟아 나온 온천탕 세 개가 있다. 1층에는 한식당과 커피숍, 2층에는 연회장과 바가 마련되어 있으며, 호텔 3층부터 6층까지는 객실이다. 영암에서 유일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군민들은 물론 월출산을 방문한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은 명소였다. 특히 이곳의 온천수는 월출산 맥반석 온천수여서, 각종 미네랄 성분과 용존 산소량 및 원적외선 방사량이 풍부해 피로회복과 신경통, 류머티즘, 알레르기성 피부 질환, 무좀 치료 등에 탁월하다고 알려져 각광을 받기도 했다. 어찌보면 우리 영암의 랜드마크일 수도 있는 관광시설인데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하반기부터 영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천태기 이장에게 신흥마을이 월출산온천관광호텔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서로 교류한 부분이 있었는지를 묻자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화순의 도곡 온천은 마을주민들에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월권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마을 발전기금도 기부하면서 온천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주민들과 소통을 잘 했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 온천호텔은 그런 편의를 제공하거나 마을주민들과 교류하고 연대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우리 마을이 대보름이 되면 풍물을 치면서 지신밟기를 했는데 마을에서 꽤 떨어진 온천호텔까지 가서 풍물굿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소통하지 못했어요.”

“그럼 대보름 때 당산제도 모셨나요?” “ 아니요. 우리 동네는 그냥 지신밟기만 했어요. 풍물을 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 쌀바가지 밑에 금일봉을 준비해 놓습니다.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었지요. 그때가 동네가 떠들썩하니 사람 사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동네 깡쇠 어른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풍물도 쇠퇴하여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대보름 지신밟기를 위해 마을회관에 모여서 풍물 연습을 하고 마을공동체 정신을 고양하던 그때가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여 마을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문화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런 애석한 일들이 어디 신흥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없어서 전통문화가 단절되고 심지어 마을이 없어질 처지에 놓여있다고 아우성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쓸쓸한 발걸음을 이웃 마을인 원해창으로 돌린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