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5)
■ 군서면 해창리 목화정마을

목화정마을 전경 / 예로부터 목화를 많이 심어 목화정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25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경남 함안의 여류 이병철 선생이 쓴 새해맞이 편지..      
목화정마을 전경 / 예로부터 목화를 많이 심어 목화정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25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경남 함안의 여류 이병철 선생이 쓴 새해맞이 편지..      

함양 숲마루재에서 온 새해맞이 편지

매년 새해 아침이 밝아오면 천리길 떨어진 먼 곳에서 반가운 편지 한 통이 온다. 일찍이 25년 전부터 농업과 생태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창설하여 귀농·귀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던 여류 이병철 선생이 경남 함안에 귀촌하신 후부터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자세와 태도를 밝히는 편지를 보내오신다. 매년 새해맞이 화두로 한 마디 문자를 선정하여 그 의미를 시로 밝힌다. 검은 호랑이의 해인 임인년 새해에는 ‘깨어날 성(醒)’자를 선정하여 반성과 성찰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오셨다. 선생의 새해맞이 편지는 언제나 새롭고 경건하다. 길을 나서기 전에 옷깃을 여미고 다시 한번 정독하면서 글귀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헤아려 본다. 

성(醒), 깨어나자 
                                     [여류 이병철]

지금은 겨울,
어느새 혹한의 삼동이 시작되었다
캄캄한 어둠,
밤하늘에 먹구름 짙어 별들도 빛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잘못 든 길,
여태 지난 봄 꿈에 취해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할 곳을 잃었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어나서 다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 대지의 자식이었음을
나무와 새와 강과 바람이 우리의 형제였음을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감사와 존경, 가슴 떨림, 경이로움, 황홀함
그 신명과 기쁨의 순간들이 곧 살아있음이며
우리가 사고 판 것이, 
죽음으로 내몰고 부쉈던 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둥지였고 우리의 생명이었음을

깨어나 살길을, 
더불어 사는 길 찾아야 한다
지상의 어느 한목숨 따로 떨어진 것 없으니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주는 대로 받게 되어 있느니

그렇다 깨어난 우리가 걷는 길이
다시 개벽의 그 새길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가 깨어나는 것이 세상이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 어둠을 비출 등불 하나씩 밝혀 들고
새로운 길 열어가자
서로를 품어 혹한의 겨울을 견뎌내며
모시고 살리는 새봄을 열자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
새로운 사람이 곧 새로운 세상이니
자신을 여는 것이 세상을 여는 것이니

목화(木花)가 많았던 목화정마을

장사리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신덕정마을을 거쳐 목화정으로 향한다. 신덕정 소나무를 지나 소랏재라 불리는 고개를 넘어가면 목화정마을이 나온다. 한점일 이장에 의하면 마을 가구 수가 현재 25호 정도라고 한다.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는 옛 기록물이 모두 소실되어 잘 모른다고 한다.

마을 원로인 정석채 어르신(88)을 만나 궁금한 점을 몇 가지 여쭤보았다.

“왜 이 마을을 목화정이라고 합니까?”

“목화를 많이 심어서 목화정이라고 하지. 여기 흙이 좋아서 그런지 아무데나 심어도 잘돼. 목화는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공출되었고, 씨앗용으로 산속에 숨겨놓았다가 봄에 심었제. 일본놈들이 씨도 안 냄기고 다 빼앗아 갔으니께. 활로 애럽게 솜을 타서 이불에 넣고, 빼낸 씨는 씨앗으로 보관했어.”

이 궁벽한 바닷가 마을까지 쳐들어와 민중들의 재산과 일상을 약탈해간 일제의 만행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솔대 전설

어르신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솔대 전설이 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목화정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솔대가 있어라. 그전에 여기는 원래 함양박씨들 터인데 여기 승지 벼슬한 양반이 계셔서 마을 앞에 솔대를 세워 놓았어라. 그곳을 지날 땐 말을 타다가도 내려야 하는 것이 규범이제. 그런데 어느 날 신행길에 신랑이 말을 타고 가면서 하마(下馬)를 하고 가야 쓸 것인 디 하마를 안 하고 갔는갑습디다. 그래서 함양박씨 문중에서 그 신랑을 잡아다가 매질을 했드라요. 그란디 매질을 한 사람이 손때가 내렸는가 어쨌는가 몰라도 한 번 때린께 돌아가셔 부렀어. 옛날에는 살인을 하면 사돈네 8촌까지 지장을 받었는가 봅디다. 그래서 함양박씨 집안 사람들이 밤밥을 먹고 솥단지하고 이불만 짊어지고 도망가부렀어. 그때 함양박씨 집안이 망해분 것이제. 그 뒤로 무안에서 밀양박씨가 들어오고 나주에서 청주 한씨가 들어왔어. 그 후로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제.”

“솔대가 뭔가요?”

마을 입구 질가에 평평한 대가 있어. 돌로 축대를 하고 그 위에다가 소나무를 심어 놓제. 그것을 솔대라고 해. 어떤 마을은 솟대를 세워 놓기도 한디 솟대나 솔대나 매한가지여. 신성시 했제. 솔대를 지날 때는 구분이 있어. 벼슬이 높은 양반은 그냥 지나가도 되제. 함양박씨 그 양반은 승지 벼슬이었는디 신행길 나섰던 신랑은 그보다 벼슬이 낮았는가 보제. 신행길에 신랑이 솔대 앞에서 하마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가 변을 당했고 그 일로 인해서 함양박씨 일가가 밤 봇짐 싸고 도망갔다는 그 일을 ‘솔대 전설’이라고 하제.”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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