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4)
■ 군서면 도장리 장사리(하)

장사리 사머리에서 내려다본 간척지. 영산호 하굿둑을 막기 전에는 끝없이 펼쳐진 천혜의 개펄이었다. 
장사리 사머리에서 내려다본 간척지. 영산호 하굿둑을 막기 전에는 끝없이 펼쳐진 천혜의 개펄이었다. 

장사리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당산나무인 감나무를 지나 경사가 제법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좁은 농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니 구릉의 끝머리에 다다랐다. 마침 밭에 나와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셔서 주민들이 이 지점을 어떻게 부르느냐고 여쭤보았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사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뱀처럼 길게 늘어진 형국의 장사리 반도(半島)의 끝 지점이다. 사머리에 잠시 멈춰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 월출산이 우뚝 솟았고, 서쪽으로 은적산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섰다. 성양리·동호리를 지나 저 멀리 서호면 엄길리 철암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은적산 상은적봉과 하은적봉이 아른거린다. 북쪽 마을 언덕 너머로 시뻘건 황토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지고 들녘 맞은편에 성양리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라보이는 들녘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광활한 개펄이 펼쳐진 바다였다.

주민들이 ‘가락끝’이라고 부르는 곳은 아마도 사머리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아스라이 사라지는 저 북서쪽 지점일 것이다. 월출산 초수동 골짜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성지천(省之川)과 낙안촌(洛雁村)을 지나 이곳에 이르고, 월출산 큰골에서 발원한 시냇물은 녹암리와 원해창을 지나 이곳에 이르니 가락끝(가내말)은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찰지고 맛좋은 해산물 넘쳐나

지금은 간척되어 평야로 변했지만 가락끝 포구에는 60~70척에 이르는 나룻배와 고기잡이배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갈매기들 자유롭게 창공을 누비며 어부들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날개짓을 했으리라. 뱃길은 영산강 물길 따라 가락끝 포구에서 북쪽으로 해창, 도포, 남해포, 영산포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는 동호와 양장 원머리, 성재리, 상대포와 아천포까지 이어졌었다. 

이곳에선 숭어, 모챙이, 장어, 대가니, 석화, 맛, 게, 조개 등 찰지고 맛좋은 해산물이 넘쳐났다. 마을주민들에게 그 당시 고기잡이 활동에 대해서 물으니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숭어는 어떻게 잡습니까?)
박준채 씨가 답한다.“어란이 든 숭어를 잡을 때는 큰 그물을 쓰제라. 동호리부터 장사리까지 일제히 말뚝을 박아서 그물을 쳐요. 엄청난 면적의 개펄을 말뚝 그물로 막아서 큰 고기를 잡는 것이요. 그것을 궁치매기라고 하요. 큰 그물이라 작은 고기들은 다 빠져나가고 애기들만큼 큰 뻘숭어들만 잽히제라. 기름진 뻘에서 잘 묵어갖고 지름이 번질번질 해불지라.”

(여기는 어란 만든 분은 없나요?)
“영산강 막은 후로 숭어가 안 잽히니께 안하지라. 지금 어란은 딴디서 가져와서 만들지라. 간장에 담그고 늘 참기름 바르면서 말리는디 꼬들꼬들 해질 때까지 말리지요.”

개매기에 대한 추억
(고기 잡을 때 개매기 체험하는데 무엇인가요?)
“개매기로는 그물을 한 150~300m 밑에다 깔아놔요. 그래갖고 말뚝을 박아서 물이 한참 들면 탁 추켜올려서 놨다가 그걸 싹 끄집어올려 물이 빠지면 고기를 잡죠. 안 잽힌 것이 없어.”

(개매기로는 무엇을 잡나요?)
“그물코에 잽힌 것은 다 잡아요. 숭어, 운조리, 모치 등등 전부 잡제라. 그라고 뜰망이라고 있어. 뜰망이 뭐이냐면 요렇게 그물이 있어. 그물을 꽉 눌러갖고 거기다 놔뒀다가 큰 간대로 해서 그물을 네 귀에 달아갖고, 그대로 주저앉쳐 놨다가 고기가 들면 들어서 고기를 잡제. 고기가 들것 같으면 재빨리 사람이 가서 눌러주제. 숭어 모치도 잡고 자화도 잡고 하제. 자화 그물은 배그밴 모그장 그물을 넣어서 들어 올려서 잡제. 자화하고 새화하고 밭으제. 여기서는 시라시라고 장어 새끼도 많이 잡았어. 통이 있어 갖고 체에 밭아서 그런 식으로 잡아라.”

(장어는 어떻게 잡아요?)
“글캥이로 잡제라. 발이 3개가 있어라. 장어가 그 속으로 들어가 요렇게 글캥이로 긁으면 장어가 찍하고 잡힌지라. 요즘 장어는 시라시를 잡아서 양식으로 키운 장어이고, 여그치는 완전 자연산 장어이제라.”

(여기 자연산 장어 먹고 아픈데 낫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우리 친척 중에 폐결핵에 걸린 사람이 있었는디 장어를 하루에 1kg씩 한 달 동안 먹었더니 완치되었지라. 그만큼 영양보충으로 최고요. 장어새끼를 시라시라고 하는디 시라시 잡은 이야기를 할라요. 시라시를 잡는 시기는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부터 준비하제라. 음력 3월에 가장 많이 잡히고요. 당시에는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했지라. 한 마리에 100원에서 150원까지 했은께 상당했었제라. 시라시를 잡을 때는 물결이 잘 흐른 데다 그물 설치를 잘 해야제라. 장어새끼가 오면 잘 건지기만 하면 되제. 재수가 있어갖고, 잘 잡으면 1kg까지 되었어라. 약 1천 마리 정도라고 봐야죠. 당시 소득이 논으로 서마지기 이상, 쌀로는 한 80가마니 정도라고 했으니께 굉장했어요.”

신비의 샘 ‘할미당 시암’

한편 마을 주민들은 공동 우물인 ‘할미당 시암’에 대해 거의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박종현 씨 설명이다.

“할미당은 당시암인디 물이 잘 나오지라. 물맛이 또 어트게나 좋던지 뱃사람들이 식수로 썼다요. 원래는 들샘이었는데 지하수가 많이 나왔어. 샘물이 하도 좋다고 해서 제사도 모셨제. 정초에 샘굿도 하고 그랬제. 뱃사람들 생명수라로 봐야제. 고기 잡으러 멀리 가신 분들은 항아리에다 그 물을 떠가지고 갔제. 보름 이상 놔둬도 물맛이 그대로인께, 좋은 물이다 해서 생명수 역할을 톡톡히 했제. 이 당시암물이 펑펑 잘 나왔어. 바위 위로 그냥 솟아올라 나오니께.”

(그럼 왜 할미당이라 했을까요?)
“부락이 명칭이 다 있어라. 큰골 작은골 시암골 등등. 당시암 근처에 할미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할미당이라 했는갑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요만, 500년 묵은 감나무가 서 있는 곳이 할아버지 당산이고, 바닷가에 있는 할미당 들샘이 할머니 당산이었을 것이요.”

‘할머니 당산 샘’이 ‘할미당 시암’으로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사리도 옛날에는 당산제를 크게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할미당’이라는 이름은 할머니 당산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다. 감나무를 할아버지 당산으로, 주민들과 뱃사람들의 생명수 역할을 한 공동샘을 할머니 당산으로 불렀던 것이리라. ‘할머니 당산 샘’이 ‘할미당 시암’으로 불려진 것이다. 하지만 상쇠어른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 당산제를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인 감나무를 지나 장사리를 떠나면서 마을 젊은이들이 다시 힘을 모아 대보름날 당산제를 모시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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