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3)
■군서면 도장리 장사리(상)

도리촌에서 나와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마을 입구에 장사리 마을이라고 표시된 입석이 보인다. 입석 하단에 마을 유래에 관한 글이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장사리(長沙里)마을 유래

“도장리 반도의 끝부분에 뱀 형국이어서 원래는 길 장(長)자와 뱀 사(蛇)자를 쓴 장사(長蛇)라는 지명이었으나 중간에 끝자가 모래 사(沙)로 바뀐 것 같으며, 마을 반도의 맨 끝이 가락 끝이라 하여 포구(浦口)였는데 그곳에 1500년대에 정씨가 들어와 살았다 하고, 그 후 밀양박씨와 고흥고씨가 도리촌에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된 것 같다. 마을 앞에 400년 된 감나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가구 호수가 75호 정도였으나 지금은 차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65호 정도의 중촌(中村) 마을이다. 현재는 밀양박씨, 장흥고씨, 전주이씨, 이천서씨, 김해김씨 외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장사리는 실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半島)이고 뱀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양의 형국이다. 장사리를 답사하다가 마을 위쪽 고개에서 한 주민을 만나 이곳을 주민들은 어떻게 부르냐고 물었더니, ‘사머리’라고 부른다고 답했다. 뱀머리라는 뜻으로 장사마을의 머리쪽에 해당한다.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니 서남북 방향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멀리 영산강이 보인다. 영산호가 생기기 전에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바다였다. 사머리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장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뱀 형국을 뜻하는 장사(長蛇)가 왜 모래를 뜻하는 장사(長沙)로 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마을 이름에 뱀 사(蛇)자를 쓰는 것이 썩 마땅치 않게 여겨져 모래 사(沙)자로 바꾼 것 같다. 이해는 가지만, 마을 지형과는 전혀 상관없는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지형 따로 이름 따로 노는 것 같아 좀 아쉽다. 마을 소지명으로는 사머리, 할미당(큰 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산제당(山祭堂)을 지내는 당집), 당시암(당에 있는 샘, 뱃사람들이 생명수로 여겼다고 함), 절태(큰 골 위의 골짜기에 있는 절터), 조금나리(마을북쪽에 있던 나루터), 가락끝(가내말(加乃末)), 재너메 방죽(도리촌과 장사리 사이에 있는 방죽으로 일제강점기 때 조성) 등이 있다.  

감나무가 당산나무인 마을
 

장사마을 주민들은 당산나무인 감나무에 대한 경외심이 크다. 실제 가보니 범상치 않게 생긴 큰 감나무가 마을 뒷동산에 서 있다. 감나무 곁에는 조그마한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감나무가 이처럼 큰 것은 필자도 처음 보았다. 마을 주민 박종현(82) 씨는 감나무가 수령이 500년이 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마을에 500년 감나무가 있어요. 원래는 두 그루였는데 큰 감나무는 고사 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작은 감나무이지라. 몇 년 전 금정에서 군 관계자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감나무 이야기를 하던 중에 “혹시 장사리에 뭐 좋은 나무 없소?” 하기에 우리 마을에 오백년 정도 멋진 감나무가 있다고 자랑을 하게 되었죠. 그랬더니 그날 바로 우리 마을로 달려와 부렀제. 감나무가 500년 묵은 것은 보기 힘들 것이요. 마을 최고 어른인 이 감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시고 당산제를 크게 지냈제라. 그란디 지금은 안 하고 있어요. 옛날 어른들 계실 때에는 보름날 군기도 치면서 집집마다 돌기도 했고요, 샘에도 군기치고 했지요. 대보름에는 샘도 다 품어서 대청소를 하고 그랬제. 깡쇠 어르신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못 하고 있지요.”

가락끝 포구에 대한 추억

주민들은 또한 가내말(加乃末)이라고도 불렀던 가락끝 포구에 대한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어촌이었으니 대다수 마을 주민들은 배를 가지고 있었고 어부로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마을 저 끝에를 가락끝이라 부르제라. 거기에 팽나무가 큰 것이 서 있고. 선창이라 해야죠. 주막도 서너 개는 있었을 거요. 한창 잘 될 때는 어여쁜 기생도 살고 그랬어. 지금은 다 없어져 부렀소. 하구언 안 막았더라면 전국에서 유명한 선창이 되었을 거요. 여그 굴이 유명했제라. 굴이 연하고 보드랍고 여간 맛이 좋았소안. 한번 긁으면 170개나 들어 있습디다. 어란 만드는 큰 뻘숭어도 엄청났지라. 신덕정에도 어란을 만들었다고 하는디, 여기가 원래 원조이제라. 여그가 큰집이고 신덕정은 작은집이고, 신덕정은 바다에서 멀고 여그는 바다가 가차왔지라. 배만해도 신덕정에 비해서 훨씬 더 많았고요. 50~60여 척이 있었으니께. 맛이고 장어고 대가니고 잡아갖고, 신북장 영암장에 가지고 가서 팔았지라. 여그가 해산물로 유명하제. 이 근방 해산물 주산지라고 봐야제. 요즘에 섬진강에서 광양꽃석화라고 나오는디, 거기 것도 여기치가 옮겨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꽃석화 그것이 여그가 원조여. 여기서 나온 것이제. 영산강에서 나온 것이 원조여. 여그 것이 더 맛있어. 거기는 머구리로 잡데만. 우리하곤 다르제. 집게라고 있어. 자연산 굴은 집게로 꼭꼭 찝어서 싸그락 소리가 나면 탁 집어 올려서 잡은디 물속에 간대를 2개 만들어서 집게를 만들어요. 그것으로 집게를 올려서 잡아라. 배에 3명이 타고 가. 똘사공이 배 앞에다 참나무 기둥을 탁 박아. 배가 안 도망가게 고정시키는 거제. 그라고 앞에 한명, 양쪽에 두 사람이서 그렇게 잡제.”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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