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32)
■ 도장리 도리촌마을

도리촌마을 전경  마을 초입 길가에 자리한 밭이 옛날 한성기 선생이 태어나 자란 집터이다.
도리촌마을 전경  마을 초입 길가에 자리한 밭이 옛날 한성기 선생이 태어나 자란 집터이다.

신덕정 5거리에서 서쪽으로 직진했다가 곧이어 왼쪽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도리촌 마을이 나온다.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리촌(道里村)은 군서면 도장리(道長里) 1구이다. 원래 영암군 서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리촌, 장사리, 가내말을 병합하여 도리촌의 도(道)자와 장사리의 장(長)자를 따서 도장리라 했고 군서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도장리를 1구로, 장사리를 2구로 운영하고 있으며, 북동쪽은 해창리와 접하고 동남쪽은 마산리와 접경하고 있다. 반도 지형으로 어업과 농업이 병합된 마을이었으나 영산강 하굿둑을 막으면서 간척지가 형성되었고 주민들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도리촌 마을이 무엇보다도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한성기 가야금 명인이 태어나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가야금 명인 한성기 태어나

도리촌 마을주민 김경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어르신들 이야기 들어보면 장승용이라고 축지법과 도술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하얀 버선을 공중에 휙 허니 던지면 비둘기가 되었다고 하제. 박만우라는 사람이 무안 일로에서 처남인 제주 고씨와 같이 들어와 동리를 이루었고 그 후에 김씨, 천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고 있제. 그라고 여기는 가야금 명인 한성기가 태어난 마을이제. 한동안 한성기 가야금 선생님 태어난 곳이라고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하더만 지금은 조용해. 따님인 한농선 씨와 함께 골목길에서 놀았던 것이 기억나. 한농선 씨는 어릴 적에도 노래를 아조 잘했어. 춤도 잘 추고. 아버지 핏줄을 타고 난 것이제.” 

한성기(韓成基1889~1950)는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의 제자로 영암군 군서면 도장리 도리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생지는 도리촌 마을 입구 진입로 바로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리촌이 고향인 영암군청 천재철 기획실장이 동네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마을 입구에 여러 기의 솟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한성기 집 앞에는 당집을 표시하는 기다란 대나무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스승인 김창조와 마찬가지로 무당집의 후손으로 재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도장리 출신의 김운옥 씨는 이렇게 말한다. “한성기 명인의 조카인 한복숙 씨를 잘 압니다. 한성기가 한복숙 씨의 작은아버지일 겁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골네였어요. 마을에서는 봄과 가을에 당골세를 냈습니다.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나락을 냈지요. 복숙 씨는 영암읍 교동리에서 세탁소를 하다가 광주로 이사 가서 사직공원 근처에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았지요. 복숙 씨의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연극을 잘했던 기억이 나요.” 

모정마을서도 한동안 살아 

한성기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관계로 태생지인 도리촌 마을을 떠나 한동안 군서면 모정리에서 살았다. 모정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생가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꼭 정해진 한 집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고 두세 집을 옮겨가면서 거처했다고 한다. 특히 모정마을 광산김씨 문각인 사권당 바로 곁에 있는 집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성기는 군서면 모정리에서 결혼할 때까지 맏형 한만기와 함께 살면서 김창조 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사사하였다. 모정마을 광산김씨 문중에서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많이 해주었다. 그는 가야금 연주자로 유명하여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마을 행사가 있을 때 초대되어 모정마을 광산김씨 문각인 사권당과 제각 선명제에서 연주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모정마을 주민들 또한 가야금 명인 한성기를 기억하고 있다. “가야금을 기가 막히게 탔제. 마을에 행사가 있으면 와서 연주를 해주었어. 사권당이나 우리 마을 호숫가 정자 원풍정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구경했었지. 가야금 가락이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듣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제.” 모정마을 주민 고 김학수 씨가 생전에 늘 들려줬던 말씀이다.

한성기는 목포, 장흥, 대구 등지에 거주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 특히 1921년 김죽파(김창조의 손녀)가 11세 되던 해에 목포에서 살던 김죽파의 양부모(양기환)의 집에 초대되어 3년간 기거하면서 가야금산조를 죽파에게 가르쳤다.

한편 모정리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한성기는 목포로 떠나고 형 한만기는 광주로 떠났다. 형 한만기도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대금이나 피리도 잘 불었지만 특히 기타를 잘 연주하여 광주 충장로에서 그 재능을 발휘하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당대 최고의 연주가로 명성

일제강점기 때 한성기는 시에론 레코드 음반과 태평레코드(다이헤이) 음반 2개를 남겨 당대의 가야금산조 연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여러 연구가들에 의하면 한성기 명인은 판소리 흥보가 중 중타령을 비롯해서 사랑가, 새타령, 호남가, 명기명창 등 수많은 녹음을 남겼고, 다른 산조에 비해 계면조·강산제가 많고 농현이 심오하며, 조의 구성이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한성기의 가락은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통해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음반은 가야금산조 1세대인 김창조의 음악이 어떻게 제2세대인 한성기를 거쳐 제3세대인 김죽파에게 전승되었는지 그 연계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연변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조선민족음악가사전’(상편)에 “한성기는 당시 첫 자리에 꼽히는 가야금 연주가로서 최옥삼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전수함”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를 보면 그는 당대 최고의 연주가인 것을 알 수 있다. 한성기가 가르친 김죽파, 최옥삼은 이후에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오늘날 가야금산조가 맥을 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무남독녀 한농선도 대 이어

한성기는 우리 영암이 낳은 위대한 국악인이다. 그의 딸인 한농선(1934~2002)도 뛰어난 국악인이었다. 한농선은 가야금 명인 한성기의 무남독녀로, 1934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목포에서 자랐다. 14살에 판소리에 입문해 강장원·박녹주·박동진 명창에게 사사했으며, 1950년 여류명창 박초월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이어받았고, 1952년에는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춘향가’를, 1953년에는 박녹주에게서 ‘흥보가’를 전수받았다.

또, 부친인 한성기 명인에게는 8세부터 18세까지 가야금산조, 병창, 가야금풍류 등을 학습했다. 한농선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졸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목포의 최막동 선생을 찾아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1950년 9월)인 18세까지 가야금과 소리 공부를 함께 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한농선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인 한성기는 딸에게 소리를 가르칠 때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제대로 따라하지 않을 때는 회초리를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농선은 28세 때 여류 명창 박녹주(1906~1978) 씨를 만나 평생을 모녀같이 지내며 판소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박초월 씨한테 수궁가를 배우고 김소희 씨한테는 심청가와 춘향가를 이수 연마했다. 한농선은 송만갑, 김정문, 박녹주, 한농선으로 이어지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잇는 명창으로 일컬어진다. 200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조상현 명창하고는 친남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상현 명창은 장례식장에서 한농선을 누님이라고 목메어 부르면서 조사를 낭독했다.

한농선은 후사를 두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한농선이 무남독녀였으므로 한성기 선생의 대가 여기서 끊기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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