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정마을 전경  신덕정은 동네 한 가운데로 도로가 나 있고 그 도로를 경계로 동서가 나뉜다. 마을 중심부는 쏙 들어가고 동서 양쪽 가장자리는 쑥 올라와 있어서 소쿠리 모양을 하고 있다.
신덕정마을 전경  신덕정은 동네 한 가운데로 도로가 나 있고 그 도로를 경계로 동서가 나뉜다. 마을 중심부는 쏙 들어가고 동서 양쪽 가장자리는 쑥 올라와 있어서 소쿠리 모양을 하고 있다.

소쿠리 명당에 자리 잡아

오산로를 따라가다가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적비를 지나면 오거리가 나온다. 주민들은 이곳을 잿등이라고 부른다. 왼쪽으로 가면 낙안마을이 나오고 곧바로 가면 도리촌과 장사리가 나온다. 오른쪽 길은 목화정 마을로 통하는데, 지대가 제법 높아서 주변 풍광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이 구릉 한 가운데 신덕정의 명물인 500년이 넘는 수령의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신덕정은 해창리에 속한다. 본래 영암군 서시면 지역으로 바닷가에 창고가 있어 창말, 창촌, 해창(海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모가정, 신덕정, 도화동 등을 병합하여 해창리라 칭하고 군서면에 편입하였다. 북동쪽에 덕진강을 경계로 도포면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영암읍 송평리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도장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신덕정을 해창리 1구, 원해창을 2구, 목화정을 3구, 신흥을 4구로 운영하고 있다. 덕진강을 끼고 있어서 어업이 주업이었으나 영산강 하굿둑을 막은 뒤로는 너른 간척지가 생겨 쌀농사가 주를 이룬다. 옛날에 신덕정(新德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그 정자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신덕정이라 했다고 한다.

여러 성씨 정겹게 어울려 살아

오산마을이 성묘산을 주산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면, 신덕정 마을은 동쪽으로 가삼봉을 마주하고 있다. 약 500년 전에 영암읍 용흥리 세실마을 하동정씨 가문 정구의 차남 정팽일(酊彭日)이 이곳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경남 함양에서 함양인 박양신이 ‘후손이 길이 번성할 곳’이라 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또 서호면 몽해리에서 김해김씨 자손들이 이거해 오면서 김해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현재는 김씨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강씨, 고씨, 박씨, 곽씨, 정씨, 이씨 등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주민 김양호 씨에 따르면 마을이 가장 번창했을 때는 80여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50여 가구가 화목하게 살고 있다. 주민들은 영산호가 생기기 전 개펄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영산강하굿둑 생긴이후 사라진 뻘숭어 

마을주민 김성호 씨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어른들한테 들었는디 우리 신덕정마을이 소쿠리 명당이라고 합디다. 잿등에서 내려다보면 양쪽이 폭 올라있고 가운데가 쏙 들어가 있어서 영락없이 소쿠리맨키로 생겼지라. 영산호 막기 전에는 쩌그 아래까지 뻘밭이었어라. 여기는 덕진에서 물이 내려온께 덕진강이라 했지라. 나주 영산포에서 내려오는 물은 영산강이고. 여기 뻘이 좋으니까 고기 맛이 좋았지라. 존 고기는 여기서 다 나왔어요. 궁궐로 진상까지 했으니까. 숭어도 많이 잡혀서 어란도 많이 만들었어라. 숭어알을 여기에서 제조해 갖고 팔았으니까. 장어도 무지하게 잡았지라.

숭어라고 해서 다 같은 숭어가 아니어라. 숭어도 섬숭어가 있고 뻘숭어가 있어라. 섬숭어는 비옥한 뻘이 없는 섬 자갈밭에서 사니라 뭣을 못 묵고 살아서 삐쩍 말라 있지라. 그래서 크기가 같은 구찌라도 섬숭어는 어란이 작어라. 여기 우리 동네 뻘숭어는 뭣을 잘 먹고 살아서 알이 땔싹 커요. 섬숭어와 뻘숭어는 비교가 안 되어 부러라. 자갈 쓰글쓰글한 섬 바닷물에서 뭐 묵을 것이 있겄소. 그란디 그 배실배실한 섬숭어가 여기 뻘밭에 와서 째깐만 살면 기름기 반지르르한 뻘숭어가 되야분단 말이요. 바다에서 못 묵고 살아서 삐쩍 마른 놈들이 여기 와서 한 달만 살면 기름이 땀뿍 차부러요. 살이 통통 쪄갖고 기름이 번질번질하니 작클해부러라. 여기 뻘이 워낙 존께. 뻘이 아조 허리까지 빠져분단께요. 허벅지까지 빠진 것은 기본이고요. 그라고 여기 뻘은 찰지고 영양분이 많기로 유명해부요. 뻘이 좋으니까 고기가 기름지고 맛이 좋았지라. 뻘숭어 큰놈은 열댓 근 나가부러라. 열일곱 근 나간 놈도 있어라. 그런 놈 잡아다 배를 따서 어란을 꺼내면 몇 킬로그람 나가불제라. 엄청나부러요. 그런 뻘숭어알로 참기름 발라 어란을 만들어부러야 진상감이제라. 영산호 막어분 뒤로는 이라고 엄청난 뻘숭어를 다시는 볼 수 없지라. 인자는 다 옛날 이야기제라.”

신령스런 소나무와 팽나무

오거리 잿등에서 목화정 마을로 통하는 구릉을 이곳 주민들은 잔등이라고 부른다. 이 잔등은 원래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이 점점 잔등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고령의 소나무 한 그루만 남아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마을주민 김성호 씨는 불에 타서 죽어버린 팽나무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주민들은 하나같이 현재 남아 있는 소나무를 보통 나무가 아닌 신령스러운 당산나무로 우러르고 있다.
 
“지금 작은 팽나무 한 그루 있는 그 자리에 원래는 어마어마하게 큰 팽나무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콩을 메믄 지금같이 바로 탈곡을 못하고 콩동을 묶어서 놔뒀다가 가을 끝나고 차분히 뚜둔다 말이요. 그란디 마을이다 본께 사람들이 콩동을 마을 길가에 세워놓기도 하고 길가 고목나무 둘레에 뺑 둘러서 싸놓기도 했단 말이요. 그란디 어떤 사람이 콩동에 불을 질러부러갖고 그 팽나무가 없어져 부렀어라. 그란디 그 불 질른 사람도 한 달도 안 되서 바로 죽어 부렀소. 불질른 집안 사람들이 안존께 거기 가서 굿하고 뭣하고 했는디 굿한다고 뭐이 좋아지겄소?

한 사람만 그란것이 아니었소. 또 보리 탈곡하다가 이 큰 소나무도 불이 나부렀어. 그 불낸 사람도 고의는 아니었지만 얼마 안 가서 죽어 부렀어라. 그랑께 그 보리대라는 것이 기름기가 있어갖고 화악 불덩이가 위로 올라간단 말이오. 그라고 보리더미가 폭삭한디, 그거이 아조 기계로 때려부러았고 파삭파삭하니 불에 어찌 잘 타지라. 불길이 화악 하고 위로 올라감시로 크나디 큰 소나무 가지를 다 불살라 부렀지라. 소나무 한쪽이 아조 배레부렀어라. 그랑께 그 뒤로 나무 좋게 한다고 막걸리 사다 붓고 나무 병원에서 와서 치료도 해주고 애를 많이 썼어라. 노거수는 관리가 어렵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신덕정 마을에는 신목이 두 그루나 있었던 셈이지라. 큰 나무는 함부로 손대면 큰일 나붑니다.

소나무가 500년도 넘은 어른이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라 해마다 당산제를 모셨지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지냈는디 요새는 힘이 부쳐서 못 하고 있어요.”


 <계속>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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