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산을 지나 가삼봉 너머 멀리 월출산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아래  사진은 신덕정 가는 길가에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성묘산을 지나 가삼봉 너머 멀리 월출산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아래  사진은 신덕정 가는 길가에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신덕정 가는 길

원마산을 지나 해창리 1구인 신덕정마을까지 가는 길은 가삼봉에서 길게 뻗은 산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신작로길이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곳곳에 전설과 설화가 숨어 있다. 신덕정 못미처 길가에는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오산로를 걷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흥미롭고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가삼봉의 소나무 전설

원마산 마을 주민 오병길씨는 가삼봉 소나무에 대한 전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마을 앞 산을 주위 사람들은 가삼봉이라고 하는데 생긴 형태가 어른들이 시제나 제사 때 입었던 옷 모양과 같아서지요. 산 정상에 상당히 큰 소나무가 있었어요. 방솔나무라고. 척박한 땅인데도 수형도 좋고 아주 멋지게 생겼었지요. 어른들이 멀리서 배 타고 들어올 때 멀리서 그 소나무를 알아보고 ‘마을에 다 왔구나’하고 짐작할 정도로 큰 나무였다네요. 그란디 한 70년이나 되었을 겁니다. 이웃 동네 아무개 양반이 그 소나무를 베다가 땔감으로 쓰려고 욕심을 낸 거죠. 그때만 해도 나무가 귀한 시절이라 그 생각을 했나 보대요.

그 양반 말이 그랬대요. 나무를 베어 냈더니 나무 색깔도 어째 붉으스름하고, 장작도 안패어지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용을 써서 도끼질을 해도 나무에 먹히질 않고 오히려 그 양반이 시름시름 앓아눕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점 기운을 잃더니 며칠 못가서 죽었대요. 사람들이 큰나무 베다가 지골 맞아서 갑자기 죽은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라고 그 소나무가 베어나가고부터 그 옆에 있던 우물도 말라버렸고요. 소나무가 있을 때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있었던 샘이었는디 말이에요. 지금도 우물 자리는 옴팍하니 터 자리만 남아 있습니다. 예로부터 당산나무 큰 나무는 함부로 건들지 않고 오히려 잘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어른들은 늘 이야기했었지요. 사람은 길어야 백 년 살지만, 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고 하셨지요.”

성묘산의 남매 전설

목화정 마을 주민 정석채씨는 성묘산 성터와 관련된 설화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산마을 성묘산 꼭대기에 봉화대가 있어. 봉화대 주변에 성이 있어. 옛날에는 성 아래에서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지. 이 성을 쌓은 남매 전설이 전해오제. 이 남매가 성묘산에 성을 쌓기로 했는데 서로 내기를 했어. 누나는 밥을 해서 차리기로 하고, 동생은 돌을 주워 성을 쌓기로 했는디 누가 먼저 하는가 내기를 한 것이제. 누나가 부지런히 밥을 짓는 동안에 동생은 돌을 주어서 싼디 그 양반이 축지법을 써서 작대기로 돌을 때려 올려서 성을 쌓았어. 봉화대 주변을 빙 둘러서 쌓았는디 눈 깜짝할 사이에 완공해부렀다는 것이제. 성묘산은 별로 높지도 않은데도 이곳에 봉화대를 설치한 이유가 있어. 이 봉화대는 영암 서남쪽에서는 제일 연기가 잘 보이는 곳이제. 이쪽은 바닷가여서 사방이 확 트였제.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성묘산이 제일 높은가 봅디다. 영암 저쪽은 월출산에 가려서 잘 안보여. 봉화대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동네 사람들이 만사 제쳐놓고 뛰쳐 나갔제. 그라고 봉화대 곁에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는데 가뭄이 들면 거기에서 기우제도 모셨어.”

오산로를 따라 걷다가 신덕정마을에 거의 도착할 무렵 길가에 제법 큰 비석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 앞에는 작은 설명 판이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재홍 선생의 공적비이다.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1892. 8.25~1938.7.28)은 군서면 신덕정 출신으로, 정부에서는 김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13년 김재홍 선생 공적비를 지금의 자리에 건립, 2016년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영암출신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김재홍 선생의 공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4월 10일의 영암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면서기로 재직하면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였으며, 동료직원인 최민섭(崔旻燮)과 함께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6백여매, 태극기 50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비밀리에 등사하였다.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수많은 시위군중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든 태극기 등의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하다가 일제의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7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의 얼을 기리며

한편 2016년에 전남서부보훈지청은 12월을 맞아 이달의 현충시설로 전남 영암군 군서면 마산리 산 18-8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 공적비’를 선정했다. 전남서부보훈지청 관계자는 “12월을 맞아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 공적비를 방문하여 3.1운동을 주도한 우리 고장 독립운동가의 나라사랑 정신과 공적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며 지역주민과 관광객의 방문을 독려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까지 독립운동가의 얼이 서린 공적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영암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김재홍 선생과 같은 용기 있는 선조들이 없었다면 과연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선조들의 기개와 업적에 대해서 고개가 숙여지고 그 고상한 정신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치재 넘어 성묘산과 가삼봉 기슭을 따라 오산로를 걷는 영암인들이라면 신덕정 마을 앞에 외롭게 서 있는 독립운동가 김재홍 선생 공적비를 꼭 한 번 방문하여 추모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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