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27)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②

오산마을 앞 논에 있었던 선돌, 일명 줄바우. 높이 135㎝, 두께 53㎝, 폭 50㎝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오산마을 앞 논에 있었던 선돌, 일명 줄바우. 높이 135㎝, 두께 53㎝, 폭 50㎝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대보름 당산제를 지낸 선돌

녹암마을 입구에 선돌이 세워져 있듯이 오산마을에도 여러 기의 선돌이 있었다고 한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의 하나로서 기둥 모양의 돌을 땅 위에 하나 이상 세워서 기념물이나 신앙 대상물로 삼은 것을 말한다. 선돌은 입석(立石, menhir), 돌꼬지, 도두, 석주(石柱) 등의 명칭이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선바위(立巖)라고도 한다. 선돌은 대체로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평지에 위치한다. 논밭 가운데나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도 있다. 선돌은 다산, 생명력, 장수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과 벽사(辟邪)·수구막이 역할 등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진 유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 전국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있다. 

오산마을에서 여러 개의 선돌을 세운 이유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닭바위와 지네바위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비보(裨補)풍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오산마을 성묘산 밑에 지네 바위가 있고 앞마을인 주암에는 닭바위가 있다. 오산마을 주민들은 닭에게 지네가 잡아먹히는 형국이라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선돌을 세웠다. 최근까지 남아 있던 3기의 선돌에는 각각 별칭이 있었는데, 논에 있던 선돌은 ‘줄바우’, 마을 앞 밭에 있는 선돌은 ‘선바우’, 그리고 마을 앞 야산에 있는 선돌은 ‘칼바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칼바우는 주암마을 뒷산의 닭바위의 목을 칼로 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86년 국립목포대학박물관에서 발행한 책자 ‘영암군의 문화유적’ 90쪽을 보면 오산마을 입석 유적 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마을 앞 야산에 있는 선돌 크기는 높이 210㎝, 두께 145㎝, 폭 40㎝이며, 마을 앞 논에 위치한 선돌은 높이 135㎝, 두께 53㎝, 폭 50㎝이다. 그리고 마을 앞 밭에 있는 선돌의 크기는 높이 100㎝, 두께 50㎝, 폭 34㎝이다.”

녹암마을과 마찬가지로 오산마을에서도 선돌과 관련해서 어떤 의례를 행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오산마을은 대보름 당산제(堂山祭)를 지내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3기가 남아 있었는데 논에 있던 줄바우는 논을 합치는 공사를 하던 중에 없어졌고 야산에 있는 칼바우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은 선바우 한 기만 마을주민 류순희 씨 집에 보존되어 있다. 이복기 씨의 안내를 받아 선바우를 친견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밭에 있어서 외부에서 바로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류순희 씨 집 안에 모셔져 있다. 조그마한 대문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외부인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사진을 찍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석을 일부 다듬어서 만든 사각기둥 모양이다. 밑에는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워놓았다. 그나마 보존은 되겠지만 집 안에 있는 관계로 전혀 볼 수가 없는 것이 단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산마을의 그 유명한 칼바위 전설도 이제는 피부로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닭과 지네 싸움 막아

닭과 지네 싸움을 막은 칼바위는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물담으로, 지네와 닭이 백 년을 주기로 서로 싸움을 벌이고 이 싸움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처방을 하는 이야기이다. 1994년 영암문화원에서 발행된 ‘영암의 전설집’에 주암마을의 닭과 오산마을의 지네가 백 년을 주기로 싸움을 벌이고 이 싸움을 막기 위해 오산마을 주변에 선돌(칼바위)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서면 마산리(馬山里) 오산(蜈山) 마을에는 지네가 많이 살았다. 지네는 길 건너 월곡리(月谷里) 주암(舟巖) 마을에 가서 사냥을 했는데 그때마다 주암마을의 닭들이 몇 마리씩 죽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지만 사실 깊은 밤 지네가 몰래 쳐들어 와 닭을 죽였던 것이다. 닭의 피해를 보다 못한 수탉 왕은 지네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암탉과 병아리는 먼저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수탉만 남아서 보초를 서게 하였다. 그러나 졸음을 참지 못한 수탉들이 잠들자 지네들이 몰려와 공격하였다. 잠결에 공격을 당한 수탉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수탉 왕은 백 년 후에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 백 년 후 주암마을은 다시 닭들이 번창했다. 닭들은 백 년 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산마을로 찾아가 지네 왕과 지네들을 죽였다. 지네 왕도 백 년 후 원수를 갚아 달라고 말하고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백 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또다시 지네가 닭을 죽일까 걱정이 되어 월암사 스님에게 상의하였다. 스님은 말뚝 세 개를 만들어 닭바위와 지네 바위가 서로 마주 보이는 곳에 박으면 닭과 지네가 싸움을 멈출 것이라고 하였다. 스님 말대로 말뚝을 박자 말뚝이 칼 모양의 바위로 변하였다. 그리고 이 바위 덕분에 닭과 지네는 싸움을 멈췄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칼바위라고 불렀다. 지금도 닭바위와 지네 바위 사이에 칼바위가 그대로 있다. 

오산마을 고인돌

한편 오산마을에도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 곳에 모여 있다. 1986년 국립목포대학박물관에서 발행한 ‘영암군의 문화유적’ 65쪽을 보면 오산마을 고인돌 유적 현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나와 있다. 

“오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북으로 약 200m 되는 지점의 낮은 야산에 위치하며 이곳을 일명 ‘도래시암골’이라 한다. 이곳에 모두 17기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그리고 조사한 내용을 도표를 이용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중에 제일 큰 고인돌(지석묘)은 장축 3m, 단축 250m, 두께 70cm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가 훼손되어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 그것도 대부분 풀 속에 가려져 있어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월출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오산마을과 들녘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땅거미가 지는 무렵에 답사했는데 마침 월출산 위로 둥근 달이 떠서 운치를 더했다. 수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인돌과 선돌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여 소실되어 가고, 또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친환경 쌀 생산단지 경영

오산마을은 현재 주암마을과 성양리를 비롯한 이웃 마을들과 더불어 약 200㏊에 이르는 친환경쌀생산단지를 경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산된 친환경 쌀은 일반 쌀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고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이복기 씨는 이렇게 말한다. “관행농법으로 짓는 것보다 수확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농약을 하지 않고 좀더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좋다. 완전 계약재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환경쌀생산단지에서 생산된 쌀은 거의 전량 판매되는 편이다. 우리 마을도 한때는 100호 가깝게 번성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절반이 줄어 50호도 안 된다. 대규모 돈사 시설 문제로 갈등이 불거져 주민들이 크게 고통받은 일도 있었다.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는 500두 정도의 돼지를 키우고 있는데 악취를 줄이기 위해 업자 나름 많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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