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마을 4

신풍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은적산 봄 풍경. 겉으로는 아늑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골짜기마다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다.

은적산 마실길을 나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은적산은 필자가 사는 모정마을에서 보면 학파들녘 너머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능선 위로 번지는 저녁노을이 인상적이다. 마을 동쪽에 위치한 월출산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반대로 둥글둥글한 능선으로 길게 이어진 여성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산이다. 그래서 은적산은 그 이름처럼 늘 한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은적산이 품고 있는 마을들을 답사하면서 그 동안 잘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은적산 역시 우리 국토를 초토화시켰던 임진왜란(1592~1597)의 참화(慘禍)를 피해가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엄길마을의 전몽성·몽진 형제, 영풍마을의 금계(錦溪) 노인(魯認), 신풍마을의 소호 서희서, 서건 등을 비롯하여 김덕란, 김덕흡, 박문립, 유장춘, 유희춘 등 정유재란 당시 목숨을 걸고 싸운 영암의 용맹스러운 의병장들과 마을 주민들의 비장한 이야기가 은적산 골짜기 골짜기마다 서려있다. 다행스럽게도 찰방 서희서가 해암포 전투에서 생존하는 바람에 치열했던 은적산 해암포 전투의 내용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풍마을을 떠나기 전에 여기 김덕흡 의병장의 후손인 김천우가 조정에 올린 상소문과 박태초가 쓴 전몽성 장군의 행적을 소개함으로써 은적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스러져간 의병장들과 주민들의 위대한 행적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의병장 김덕흡에 대한 김천우 상소문

 

나의 4대조이신 덕흡(德洽)의 효도와 우애에 대한 사실은 마을에 잘 알려져 있으며 같은 고을 사람이며 현감을 지낸 전몽성과 함께 충성을 실현하였다. 지난 정유재란(1597) 때 왜적들이 쳐들어와서 왕이 피난을 가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나의 조부와 전몽성 등 여러 사람들이 울분에 쌓여 눈물을 흘리면서 한 목소리로 의병을 모집하자고 뜻을 모아 건장한 사람들을 뽑았다. 이때에 저의 할아버지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처지라 어머니를 떠날 수 없어 쉽게 승낙을 못하였다. 이 내용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내가 나라의 위급함에 어찌 그 가정만을 생각할 수 있으며 하물며 너에게는 나를 돌보아 줄 너의 아우가 있는데 네가 싸움터에 나가지 않으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라고 하면서 크게 나무랬다. 덕흡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아우인 덕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나간 임진왜란에 의병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집에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적들의 기세가 날로 높아 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며 어머니의 가르치심이 엄하니 그 뜻에 따르겠다.”하고는 전몽성, 김덕란 등 여럿이 나뉘어서 70여명의 건장한 사람을 모아 맨 먼저 밤재를 지켰다. 밤재를 지킨 이유는 전남도의 영암과 강진 두 개의 읍 사이를 오고갈 수 있는 길목이며 적들이 쳐들어오는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곳에 숨어서 오는 적을 쳐부수니 그 숫자가 1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한 뒤로는 밤재의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후 의병 200여명을 더 모집하여 영암군의 남쪽 5리쯤에 있는 월출산에서 왜적들을 물리치는 한편 더 많은 의병을 모아서 군대의 위용을 떨치고 위로는 나라로부터 정규군의 도움을 기다렸다. 이때에 왜적들의 배가 순식간에 은적산 서쪽에 있는 해암포에 몰려들었다. 나의 할아버지와 전몽성, 김덕란 등은 의병을 이끌고 가서 두 패로 나누어 적들을 맞아 싸워 무찌르니 왜적들은 두려워서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다음 의병을 은적산 밑에 있는 유점동에 모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적들이 떼를 지어 쳐들어 왔다. 김덕흡과 전몽성이 의논하기를 “오늘의 싸움은 기회를 틈타지 않으면 안 되겠다.”하고 의병을 두 패로 나누었다.

전몽성과 유장춘, 서건(서희서의 아들) 등은 은적산의 왼쪽 기슭인 벼랑을 지키고, 김덕흡과 서희서, 유희춘 등은 은적산의 오른쪽 벼랑을 지켰다. 모두가 한 몸같이 소리를 지르고 온 힘을 내어 싸우면서 서로를 격려하니 그 기세에 눌려서 적들이 놀래 물러갔다. 그 다음날 수많은 적들이 다시 쳐들어오니 의병들 전체가 두려워 벌벌 떨었다. 김덕흡과 김덕란 등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밝은 얼굴빛으로 말하기를 “정의를 위해 의병에 참여하였으니 마땅히 죽음뿐이다.”라고 말한 뒤에 의병을 은적산 꼭대기 험난한 곳으로 옮겨서 쳐들어오는 왜적을 지키게 하였다.

은적산은 산의 모양이 남쪽과 북쪽은 모두가 암석으로 가파르고 깎아지른 듯 절벽인데 유독 동쪽과 서쪽은 적들이 쳐들어오기 쉽게 되어 있었다. 김덕흡과 전몽성은 한쪽을 맡아 늙고 어린 사람들에게 돌을 날라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게 한 뒤에 적들이 쳐들어오니 한 마음으로 온 힘을 기울여 산 밑의 적을 향해 돌들을 굴려 내리니 적들이 공격을 멈추고 후퇴하였다. 잠시 뒤에 더 많은 적들이 쳐들어오면서 앞을 가로막고 뒤쪽을 공격해오니 그 모양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되었다. 피로 범벅이 되는 싸움이 시작되어 굴려 내릴 돌이나 화살이 바닥나고 전몽성과 박문립은 죽음을 당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덕흡과 김덕란은 싸움이 아군에게 크게 불리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들을 쳐죽이는 것은 귀신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나 늙은 어머니를 남겨 두고 먼저 죽는 것은 불효가 될 것이니 그것이 원통할 뿐이다.”라고 말한 다음 칼을 손에 잡고 적진에 뛰어들어 사방으로 휘두르면서 적들의 목을 베다가 죽음을 당하니 죽은 그의 손에는 칼이 꼭 쥐어져 있었으며 그날이 바로 1597년 9월 25일이었고 전몽성이 죽고 약 2시간 뒤의 일이었다. 오직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내용이 전몽성에 대한 상소문과 같으며 정유재란 때 함께 싸웠던 서희서가 세 사람(전몽성, 김덕흡, 김덕란)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여 남겨 놓으니 그때의 일들이 눈앞에 선하다.

지난해 봄(1684년)에 전몽성은 전라도의 보고에 의하여 벼슬이 내려지고 사당을 지으라는 허락이 내리는 영화로운 일이 이루어져서 땅속에 묻힌 영혼도 즐거워하게 되었다. 나의 조부인 김덕흡은 전몽성의 공적과 비교하여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한 일이 조금도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의 충성심에 비교하여도 부끄러울 게 없으나 전해오는 지나간 일들이 오래지 않아 잊혀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며 후손된 나는 불효가 막심하나 시골에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 어찌할 줄 몰라서 죽음을 무릅쓰고 조부의 사실을 올립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전몽성에 대한 상소문에 기록되어 있으니 왕께서는 특별히 생각하시고 해당의 관청으로 하여금 오직 전몽성에게 내렸던 혜택처럼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의병장 전몽성의 행장에 대해

 

1592년에 의병을 일으켜 초토사인 고경명과 함께 금산 싸움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살아계시는데 목숨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하고 적진을 뚫고 나왔다. 이황의 부름을 받아 그를 보필할 때 구례, 남평의 군수와 별장 남응길 등이 힘을 모아 진산의 조임원을 지켰다. 왜적이 물러가니 용천으로 가서 선조대왕에게 인사를 하니 함평 현감의 벼슬이 내려졌고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다스려졌다. 1596년에 이성 현감을 명받았으나 늙은 부모 모시는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아우인 몽태에게 부모 모시는 일을 부탁하고 둘째 아우인 몽진과 전 첨사 유장춘 등과 함께 수 천 명의 의병을 모아 밤재에 숨어서 많은 왜적을 무찌르니 영암과 강진의 백성들은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전몽성을 장수(將帥)로, 유장춘과 박문립을 왼쪽과 오른쪽 장수로 삼았다. 이렇게 한 뜻은 군사를 이끌고 왕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아우인 몽진이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이를 본 의병들이 좌우로 흩어질 때 전몽성과 유장춘 등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적진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대다가 화살이 없어지고 활시위가 끊어졌다. 이때 온 힘을 모아서 큰 소리로 “몸을 바쳐 적을 물리치는 것은 신하된 책임이지만 늙은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먼저 죽는 것은 불효가 되겠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적진에 뛰어들어 6∼7명의 목을 한칼에 벤 뒤에 죽음을 당하니 1597년 9월 25일이었다. 10월에 호산에 묻으니 대낮에 무지개가 서서 진종일 없어지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이상히 여기게 하였다.

(1685년에 호남의 선비들이 도지사에게 상을 내리라는 상소문을 올리니 숙종 임금께서 “임난항의위국손생(任亂抗義爲國損生)”이라고 직접 쓴 8자의 글씨와 병조참의에 증직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 뒤인 1868년에는 제사를 못 지내게 하는 일이 있었으며 1887년에는 병조참판의 벼슬이 내리고, 정여(旌閭)를 건립하라는 허가를 받았다. 현재 장동마을 4거리에 전씨충효각이 세워져 있으며, 엄길마을에 장동사가 건립되어 있다.)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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