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마을 3

마을 안쪽에서 내려다 본 소호정. 정자 안에는 이름 난 선비들이 쓴 시가 가득 걸려 있다.

소호정의 연혁

서희서가 쓴 소호정기를 보면 ‘1589년 형과 함께 정자를 지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정자가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불에 타 없어진 건물터에 다시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주변 풍광을 끌어들여 시를 지으며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이때가 1612년이다.

존재 위백규가 1758년에 쓴 소호정기에는 "주인의 5대손 서호원(徐祜遠)이 다시 정자를 새롭게 세워, 호수의 뛰어난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중건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서호면 엄길 출신 낭은(郞隱) 최기성(崔基性, 1863~1931)이 일제 강점기 때 쓴 소호정 중건기가 걸려있다. 최기성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1906년 면암(勉菴)이 순절하자 은적산 아래에 관해재(觀海齋)를 지어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친상처럼 예의를 다했으며 후학 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남주의 사표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 후손 서용신(徐鎔新)이 "물을 어찌 끊어지게 할 수 있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할 수 없다.(水不忍廢地不忍荒)"며 제족들과 의논하여 1977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대략 살펴보아도 1589년 창건이후 다섯 번의 중건을 거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정자이다.

소호정팔운(蘇湖亭八韻)소호(蘇湖)라는 이름과 소호정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그 당시 신풍마을 주변 풍광은 거의 선경과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와(松窩)가 지은 소호정팔운(蘇湖亭八韻)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 팔경은 효옥송황(효屋松篁) 견강촌점(隔江村店) 월봉석검(月峰石劒) 연우탁가(烟雨탁歌) 죽도서구(竹島棲鷗) 용강귀범(龍津歸凡) 삼산대삼(三山黛森) 오성무열(五城霧列)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취를 거의 느낄 수가 없다. 정자 앞 푸르던 솔숲과 대숲이 사라졌고, 중국 항주의 서호 못지않게 아름답다던 호수도 없다. 갈매기 강물 위로 유유히 날며 서식하던 죽도(대섬)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범선들 오가던 용강도 사라지고 없다. 세월은 그런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고 화목하게 살았던 시절이 문명의 그림자에 가려 점점 사라져간다. 보존과 반개발이 아쉬운 대목이다.

 

소호정 내부에 걸린 시(詩)

정내에는 소호정팔경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묵객들이 남긴 시들이 여러 편 걸려있다. 우선 소호정 주인이 쓴 시가 눈에 띈다. 그는 소동파와 함께 농어회를 즐기며 정자에서 교류하는 꿈을 꾼다. 그러자 월사 이정귀와 겸재 김여옥이 차운을 한다.

 

소호정 주인 서희서의 시(詩)

 

강 마을에 돌아감이 어찌 더딜쏘냐

즐거이 맞는 어린 종은 마치 피붙이 보는 듯하네구름 속 길 질펀한 벼 이웃 친척을

호남에 외로이 뾰족하게 솟은 크고 작은 산가학산에 가을은 높아 선계 인듯하고

주룡강에는 물이 잦아지니 우임금의 치수 인 듯소동파를 어느 날 꿈에 만나게 되면

농어회로서 술자리를 질펀하게 즐기리

 

소호정(蘇湖亭) 시에 차운하여 서경추(徐景推)를 위해 짓다. 2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 명종 19∼1635 인조 13)

 

해동의 명승지라 청서와 잇닿았나니 / 名區左海接靑徐사람은 동오와 같고 땅은 소주(蘇州)보다 나아라 / 人似東吳地勝蘇한 줄기 물은 멀리 드넓은 평야 둘러싸고 / 一水迥圍平野濶어지러운 산들은 둥글게 외로운 정자 에워쌌어라 / 亂山環拱小亭孤빗속에 도롱이 눈 속에 낚시는 한가한 중 멋이요 / 雨蓑雪釣閑中趣달 아래 젓대 안개 낀 백사장은 그림 속 풍경이로세 / 月笛煙沙畫裏模문득 그대와 더불어 새로운 생활 시작하고파라 / 便欲共君新活計가을바람 불 제 어이하여 순챗국과 농어회 생각나는가 / 秋風何事憶蓴鱸남주라 아름다운 지역 나라에서 으뜸이요 / 南州佳麗冠吾邦명승지라 소호는 더욱이 비길 데가 없어라 / 形勝蘇湖更少雙처마 밖 봉래(蓬萊) 영주(瀛洲)에는 하늘이 물을 치고 / 簷外蓬瀛天拍水베개 곁 비바람에 물결은 강에서 뒤집힌다 / 枕邊風雨浪飜江차가운 조수 올라올 즈음 아침에 그물 걷고 / 寒潮欲上朝收網초승달이 막 떠오를 제 밤에 창을 밀치느니 / 新月初浮夜拓窓백발의 몸 세상살이 서툰 것 더욱 가련해 / 白首益憐身世拙고단한 인생 그 언제나 번잡한 일에서 벗어날꼬 / 勞生何日謝紛龐

(월사집 제16권)

[주] 순챗국과 농어회 : 후한(後漢)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고향 생각이 일어남을 뜻한다.

 

겸재(謙齋) 김여옥(金汝沃)의 시정자를 어찌 더디 지었는가/아름다운 풍경 항주가 소주인듯 난간 밖의 긴 당은 예로부터 웅장하고/못 가운데 한점 섬은 취미를 맞추고연하는 상중 처사의 취미를 맞추고/솔과 대는 처사인 듯 하구나.늙어서야 문득 강산의 주인이 도니/이 늙은이 가순채와 농어를 취(醉)함만은 아니리라

(김여옥은 영암군의 인물 학성군 김완의 조카로서 여러 번 벼슬제의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야인으로 남은 사람이다.)

 

이밖에도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특히 외교문서를 잘 쓰기로 유명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이곳에 들려 시를 남겼으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동곡(東谷) 이자민(李子敏)의 시도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집의(執義) 신명규(申命圭 )가 1666년(현종 7) 전라도 암행어사의 자격으로 이곳에 들려 남긴 시도 걸려있다.

 

아래의 시는 신흠의 문집 “야언(野言)”에 나오는 칠언절구 한시인데 선비의 지조와 절개가 잘 드러나 있어 퇴계 이황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풍마을 선비 서희서의 인품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한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桐千年老恒藏曲)매화는 한평생 추운겨울에 꽃을 피우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梅一生寒不賣香)달은 천 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래의 성질이 남아 있으며 (月到千虧餘本質)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柳經百別又新枝)“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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