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의 손자 임자승과 풍운아 허균의 우정은 후세인들의 심금 울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임자승은 허균과 동갑내기 막역한 사이

 

월대암에서 내려다 본 십리평야

임구령 목사가 군서 동호리와 양장 원머리를 이어 진남제를 축조하여 만든 십리평야가 멀리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평야를 중심으로 조선 중기 영암 선산 임씨들의 주무대였던 구림마을과 모정마을이 보인다.

청룡리 노동마을에서 출발하여 연정마을을 거쳐 영모정마을에 이르러 이곳에 머문 지가 벌써 달포가 지났다. 영모정마을은 월당 임구령의 후손들인 선산 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고 있는 마을이다. 월당과 그의 장남인 남호처사 임호의 행적을 뒤쫓다 보니 군서면 모정리와 구림리 일대까지 발품을 팔아야 했다. 조선 중기 영암 땅에 그들이 남긴 발자취가 뚜렷했고 향촌사회에 남긴 영향 또한 컸기 때문이다.

한편, 군서면에 요월당과 쌍취정을 짓고 그토록 활발하게 활동하던 선산 임씨들이 왜 구림 서호정을 떠났는지, 언제 서호면 용지봉 아래 영모정마을로 이주를 했는지 몹시 궁금했다. 월당의 후손인 임선수씨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구암공(남호처사) 임호 할아버지가 3남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손자인 임자승이 진사시험에 장원 급제한 인재였는데 강진현감으로 있던 중 35세의 젊은 나이에 후손을 두지 못하고 어린 딸만 남겨둔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해남 본가에서 7살 된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여 대를 잇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부모의 유산을 아들과 딸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던 시절이었다. 그 많던 재산이 월당공 집안에 장가들었던 사위들에게 분배되면서 재산의 규모가 점점 줄어들었고,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하고 결국 양자를 입양하는 사태가 오면서 재산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 집안이 많이 쇠락하게 되었다.

특히 임자승 할아버지의 요절이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서울 남사골에 살면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동갑내기 친구로서 막역한 사이였다. 원래 서울에서 살았지만 영암에 홀로 계신 어머니 곁으로 오고 싶어 강진현감을 자원했다. 장원 급제한 뛰어난 인재로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재능을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가졌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임자승과 허균이 나눈 우정

임선수씨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임자승에게 썼던 편지를 보내왔다. 친구인 임자승이 세상을 떠나자 허균은 영암까지 와서 조의제문을 짓고 장지(葬地)까지 가서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옛 선조들이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허균이 임자승에게 보낸 몇 편의 편지글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조의제문을 소개한다.

 

16012

남쪽으로 내려온 거야 원래는 자네를 보고 싶어서였는데 방백(方伯)이 옛 규칙을 없애지 못하여 능양(綾陽)에 함께 가지를 못했네. 이번에는 억지로 그를 수행하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들으니 형은 근래에 아내를 잃고 지나치게 상심한다고 하는데 대장부란 마땅히 사리(事理)대로 따라야 하네. 천하에 예쁜 부인도 많거늘 하필이면 그 사람뿐이겠는가. 인생이란 정말로 어려운 걸세. 형은 전에 순봉천(筍奉倩)의 죽음을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는 그 전철을 밟으려는가. 자네 어머니께서 살아계시고 자네는 독자로서 아들도 없는데, 지나치게 쓸데없이 슬퍼하지 말게. 자세한 것은 담양 창평 시장(試場)에서 이야기하세. 마상(馬上)에서 몇자 초하고 이만 줄이네.

 

경자(庚子) 삼월(三月)

형께서 내가 잡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경계하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오니 매우 고마운 마음이네. 그러나 이 점은 나의 참 마음을 해롭게 하지는 않는 일이네. 옛날 곽서선(송나라 곽충서의 자)은 시장 사람들을 끌고 가서 술을 마시며 나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들이다.” 하였는데, 모르긴 하지만 형께서 종유하는 사람들은 시장 사람들보다 나은가?

 

허균이 지은 임자승의 제문

아 자승이여!

하늘은 왜 그대를 냈다가 또 어째서 앗아갔단 말인가.

태어나면 으레 죽게 마련이니 자네는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자네의 뛰어난 재주는 당대에 쓰이고 밝은 세상에 떨칠 만했는데

빨리 앗아가서 그 재주 크게 쓰이지 못하니

이것이 곧 여러 벗들이 애석히 여기는 바로세.

 

아 자승이여.

노모는 살아계시고 슬하엔 아들도 없어

젊은 아내 딸아이 안고 아이고지고 울어대네.

덕 높은 사람에게 후사도 안 주다니

아 천도는 진정 알기 어렵구나.

 

남쪽 하늘은 아득아득 그 길은 꼬불꼬불

내 흰 말 타고 흰 장막 더위잡을 제

그대에게 곡한 눈물은 구천(九泉)을 뚫으리라.

그대를 슬퍼하는 정은 말로 다 못해

그대 만약 앎이 있다면 반드시 날 위해 흐느끼며 눈물 흘리리.

 

지난 봄 해양에서 한 이불 덮고 좋아라 할 때

그대 병 고칠 수 없다고 말하기에 내 잘 타이르며 깨우쳤지.

군평은 진실로 좁고 봉천은 너무 어리석었다고.

그대 내 말을 수긍하여 다소 그 생각 억눌렀었지.

누가 알랴 한 돌도 채 못 되어 갑자기 이승을 영영 하직할 줄을.

 

산은 험준하고 구름은 컴컴하고

해는 어둑어둑 서쪽으로 넘어가는데

굽어보니 묘의 골짜기 아득도 해라

여기서 자네와 영이별을 할 수밖에.

 

아 슬프다.

가슴 치고 통곡한들 어이 따르리.

지난날 서로 간격 없이 노닐던 때 생각하니

다시 만날 기약 없어 슬프구나.

제물(祭物) 깨끗이 올리고

정성 들여 애사 올리니

영령이여 나를 보고

와서 내 잔 다 비우소.

< 허균 성소부부고 제 15-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중>

< () >

* 군평(君平) : () 나라 때의 공탄(孔坦)을 가리킴. 군평은 그의 자이다. 공탄은 본디 강직하기로 유명한 신하로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나, 뒤에 왕도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인 정위로 쫓겨났다. 그러자 앙앙불락 (怏怏不樂)<매우 마음에 차지 아니하거나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아니함>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말았다.

 

* 봉천(奉倩): 삼국 시대 위나라 순찬(筍粲)의 자. 순봉천(筍奉倩)(순찬)은 특히 도가(道家)를 좋아하였고, 자기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아내가 일찍 병들어 죽자 이것으로 상심하여 그 역시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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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당 임구령은 1562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종 임금은 예조좌랑 송강 정철을 보내 제물을 올리고 제문을 밝혔다. “공은 영명하고 기품이 높으며 천지에 맑았으니 산악이 몰래 울며 남으로 내려가는 듯하다. 능히 나라를 근심하여 몸은 미관에 있었으나 마음은 왕실에 있었느니 비범한 인물이었도다... <중략> 내 비통함을 사직에 묶고 보잘 것 없는 제물을 보내어 충정에 보답고자 할 따름이라.”

장남인 남호처사 구암 임호는 영특했던 세 아들을 먼저 보내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구암의 손자였던 임자승은 할아버지를 여읜지 겨우 삼년 만에 후사를 잇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로써 선산 임씨들의 영화로웠던 가문이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선수씨는 선산 임씨들이 구림 요월당에서 언제 현재의 영모정마을로 이사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1760년대까지 구림 요월당에서 거주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아마도 179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에 구림을 떠나 현재의 터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모정 마을을 떠나며

시대가 인물을 내기도 하지만 인물이 시대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월당 임구령은 조선 중기이던 1536년 요월당 건축, 1540년 진남제 축조, 1558년 쌍취정 건립하여 영암에 선산 임씨들의 터를 마련하였고, 장남인 구암 임호는 고향에 머무르면서 구림 대동계를 발족하고 회사정을 건립하면서 영암 군서와 서호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쌍취정에서 아우와 함께 풍류를 즐겼던 호남삼고 중 한 사람이었던 석천 임억령의 탈속한 정신세계와 맑고 기품있는 시풍(詩風)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같은 고명한 선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임자승과 풍운아 허균의 우정은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모든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세계를 제패한 징기스칸의 후예들을 물리치고 중원에 깃발을 꽂았던 명나라도 결국 오랑캐라 업신여기던 후금에게 사직을 내어주고 말았지 않은가. 이처럼 조선 중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암의 선산 임씨들도 세월의 풍진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향마을에 남긴 학문적 업적과 마을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지금까지도 진남제 십리평야에, 모정마을 연못가 쌍취정 터에, 구림마을 회사정과 대동계사에 남아 후세인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진/글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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