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리 노동(盧洞)마을

 

밀양 김씨(密陽金氏)의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고반재(考槃齋)는 해명재(海明齋) 또는 강명재(講明齋)라고도 한다.

은적산 가미봉 아래 자리잡은 밀양김씨 세거지 꿋꿋한 선비정신 서려

가릿골 앞까지 바닷물이 밀려든 갈대밭 많은 곳

운계 김홍발 탄탄한 관직 버리고 후학양성 진력

잡초만 무성한 빈 집들 옛 기개와 정취는 사라져

 

마을 서북쪽 은적산 중턱에 옥룡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현재 노동마을과 연정마을 입구까지 옥룡암자 소유의 땅이었다. 도선국사가 이 옥룡암에서 공부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조선 인조 61628년 밀양 김씨인 운계 김홍발 선생이 옥룡암자 소유이던 근방 일대의 땅을 암자 스님으로부터 매입하여 이주하였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아래 가릿골(연정마을) 입구까지 출입했는데 주변에 갈대가 많다하여 갈대 골, 즉 노동(盧洞)마을로 개칭했다고 한다.

 

고택의 고반재(考槃齋)

마을안길로 들어서서 몇 걸음 옮기면 5개의 큰 비석과 두 채의 고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노동마을의 정신과 기상을 대표하는 건물 고반재와 노동사이다.

 

 

 

은적산 마실 길 첫 답사지로 정한 마을은 은적산 가미봉 아래 자리한 노동마을이다. 조그마한 청룡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연정마을을 지나 한참 가다보면 윗가릿재로 불리는 작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마을이 바라보인다. 초입에 실개천이 흐르고 동네 안으로 통하는 신작로 가에는 봄비를 맞아 더욱 파릇파릇해진 보리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운계정(雲溪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가 묵묵히 서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오래된 정자는 아니어도 꽤 신경써서 지은 흔적이 보인다. 건립연도를 살펴보니 2002520일이 완공 날짜이다.

정자 옆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비가 두 개나 서 있다. 거북이 등에 비석을 얹히고 상단에 용 조각을 했다. 비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노동마을 입향조 운계 김홍발 선생과 노동사를 창건한 송와 김병규 선생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두 개의 비문만 자세히 읽어봐도 노동마을의 내력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계 김홍발 시비

 

풍우소소 임갑년 오가입절 재사년

입산망세 지금시 허송광음 사육년

 

운계 밀양김공은 서기 1582년에 태어나시어 훈련원 판관에 오르셨으나 임진왜란에 부친께서 44세로 전사하시고 갑자년 이괄의 난에는 아우마저 28세의 나이로 전사하니 통탄한 나머지 청운의 꿈을 버리시고 위와 같은 시를 남기시며 이곳 옥룡동 일대 전답과 산야를 1628년에 매입, 은거 수도하시며 후학양성에 진력하시다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시니 바로 이곳이 밀양김씨의 세거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와 김병규 추모비

노동사를 창건하신 송와 밀양김공은 서기 1892년 노동에서 태어나셨다. 대대로 가도가 빈곤함을 통탄하여 목탄을 가공하시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가산을 일으키셨다.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시었으며 선대사업에 주력하시고 빈민구휼에 진력하셨다. 공은 후학에게도 상기와 같은 좌우명으로 의롭게 살도록 훈도하셨다. 서기 1936년 가을에는 심혈을 기울여 노동사를 창건하시고 종중 제족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기금 조성에 진심갈력 다 하시다가 194352세로 서거하시니 이곳 노동마을은 밀양김씨의 혼백이 서린 곳이다.

 

원래는 옥룡암자 터

마을 서북쪽 은적산 중턱에 옥룡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현재 노동마을과 연정마을 입구까지 옥룡암자 소유의 땅이었다. 도선국사가 이 옥룡암에서 공부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조선 인조 61628년 밀양 김씨인 운계 김홍발 선생이 옥룡암자 소유이던 근방 일대의 땅을 암자 스님으로부터 매입하여 이주하였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아래 가릿골(연정마을) 입구까지 출입했는데 주변에 갈대가 많다하여 갈대 골, 즉 노동(盧洞)마을로 개칭했다고 한다.

 

고택의 고반재(考槃齋)

마을안길로 들어서서 몇 걸음 옮기면 5개의 큰 비석과 두 채의 고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노동마을의 정신과 기상을 대표하는 건물 고반재와 노동사이다.

 

시인묵객 정인욱(鄭寅昱)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고반재의 아름다움과 유구함을 노래했다.고반재는 띠끌이 없는 곳에 지어졌으니

나무가 푸르른 영암 서쪽 한길로 통하네항상 선대 유지를 이어가고 있으니

이곳에 이르러 누가 우러러 보지 않으리구름을 헤치고 달밤에 거니니 마음이 맑아지고

탁자에 의지하여 글을 보며 세상 생각을 비웠구나충성스러운 정신이 천년을 이어지듯

응당 후손들은 효성과 함께 할 것을 알리라

 

솟을대문 바로 앞에 고반재에 대한 해설판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고반재(考槃齋)는 밀양 김씨(密陽金氏)의 재실로서 해명재(海明齋) 또는 강명재(講明齋)라고도 한다. 1628년에 김홍발(金弘發)[1582~1643]이 노동 마을에 정착한 후 155년이 지난 1783년에 김치상(金致商)[1738~1797]이 창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3년에 중수된 건물이다. 고반재는 밀양 김씨 문중 사우인 노동사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반재는 앞면 5, 옆면 2칸 규모로 앞면에 쪽마루를 두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좌측과 우측에 각 1칸의 방과 중앙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강학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큼직한 자연석 초석을 둔 다음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건물의 규모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큰 초석을 사용하였다.

고반재는 밀양 김씨 문중 사우가 없던 시기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김견(金堅)[1565~1608]과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錄券) 김경발(金景發)[1597~1624], 그리고 문과 급제 후 개성 경력(開城經歷)을 역임한 김종환(金宗煥)[1814~1865]의 제사를 담당하고 후손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1936년에 노동사(蘆洞祠)가 지어진 후에는 노동사의 강당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고반재에 소장된 밀양 김씨의 고문서는 모두 41접으로 과거 시험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3건이 있고,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 노동 마을에 정착한 김홍발의 후손들이 관직을 임명받은 교첩(敎牒)과 교지(敎旨)27건이 있다. 그중 임진왜란 시기에 발급받은 교첩 1건이 남아 있다. 공신녹권(功臣錄券)은 선무원종 공신녹권과 진무원종 공신녹권으로 2건이 있는데, 이는 고반재와 노동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김견과 김경발의 것이다. 토지 매매 문서 1건은 1628년에 작성된 것으로 이를 통해 밀양 김씨가 정착하게 된 배경과 경제력을 볼 수 있다. 그 외 남아 있는 호적 문서 7건은 모두 19세기의 것이다.”

 

폐동 위기의 마을

고반재로 통하는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가고 오랫동안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유서깊은 고택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집 앞에는 사람 키 보다 더 큰 추모비가 5기나 서 있고, 집 뒤편 산자락에는 커다란 묘소가 여러 기 자리하고 있다. 고반재 주변을 한참동안 서성거리다가 비문들을 읽어보았다. 입향조를 추모하는 글과 노동사 창건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들이었다. 운계 김홍발 선생이 옥룡암 스님으로부터 땅을 매입한 계약 내용을 그대로 적어놓은 비문이 흥미로웠다.

발길을 돌려 마을 골목길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마을 한복판에 오래된 건물이 있어 가보니 바로 노은 김상익 선생과 송와 김병규 선생을 모시는 은산사(隱山祠)라는 사당이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지붕이 낡고 헐어 있었다. 토담 곁에 제법 큰 동백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서 사당을 지키고 있었다. 만개한 동백꽃이 제 흥을 이기지 못하여 마당가에 뚝뚝 떨어져 있다.

골목 골목마다 빈집 투성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마을주민을 만나고 싶었으나 집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너 집은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개만 곧 달려들듯 눈을 부라리고 무섭게 짖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첫 집부터 빈집이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마당에 호랑이 새끼 칠 듯이 잡초가 무성하다. 운계정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과는 전혀 딴판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대부분 노인들만 남은 농촌마을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울적해졌다. 쓸쓸함과 더불어 두려움마저 엄습해왔다. 노동마을 입향조 선비들의 꿋꿋한 기개와 정신은 이제 저 웅장한 비석들과 문이 닫힌 고택 속에만 남았다. 후손들은 대부분 대도시로 떠났고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희망은 있다

그래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아주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노동마을 밀양김씨 후손들 중에 운계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고향마을을 중흥시키기 위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반재 고택으로 돌아오는 분이 있지 않을까? 무너진 빈집을 철거하여 새 터를 닦고 다시 마을을 일으켜 세운다. 문전옥답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정원에 매화나무와 소나무를 심어 선조들의 절개를 쫓는다. 노동사와 고반재 대청마루를 깨끗하게 닦아 의관을 단정히 하여 책을 읽고 시를 짓는다. 시인묵객들을 맞이하여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논한다. 산새들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삶을 추구하는 후손들이 몇 명만 있어도, 그 후손들이 산골마을에서 함께 살 동지들 몇 명만 만나서 돌아온다면, 노동마을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살기 좋은 귀촌마을로 부활하지 않을까? 21세기 미래는 농촌마을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감히 저런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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