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정례·삼호읍 출생·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한국문인협회 회원(시인)·문학마을 기획 및 편집위원·전 재경 삼호읍향우회장
내가 다니던 때의 용당초등학교는 흙벽돌을 쌓아올린 벽에 이엉을 엮어 얹은 황토흙집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신발에 묻혀온 흙덩이가 교실바닥에 널브러져 있어 청소를 할 때면 애를 먹곤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건강에는 더없이 좋았을 것 같아 시간을 역(逆)주행시켜 그때로 돌아 가보고 싶다.

그때 입학식 날의 벅찬 감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3월에 학동(學童)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나도 문득 그때의 소녀가 되곤 한다. 왼쪽 가슴의 노란 손수건 위에 이름표를 달고 키 순서대로 서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단체생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사회라는 공간에 첫발을 내딛게 된 그 순간− 넓은 운동장 가득히 줄맞춰 서 있던 상급반 및 우리 꼬맹이 학생들과 마주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던 선생님들…, 교장선생님의 느릿한 인사말씀이 다 끝날 때까지 자세 흐트러지지 않고 서서 엄숙하게 진행되던 입학식을 바라보며, 나도 구경꾼이 아닌 그 자리의 주인인 학생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다.

그런데 요근래 아이들의 성적문제가 어른들의 손에 의해 조작되어 곳곳이 벌집 쑤셔놓은 듯 어지럽다. 어른들이 더 잘 가르치려 애를 쓰고, 부족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하나라도 더 깨우쳐주려 합심해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쳐 당신들의 공로에 과대포장을 한 것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왜 우린 본연의 일엔 관심이 덜하고, 젯상에 놓인 먹 거리를 차지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곤 하는 것일까. 이 후진성에 결국 피해자들은 바로 우리들의 자녀들이기에 이들은 샛길과 다르지 않은 사교육(私敎育) 업체를 찾아가 중노동과 같은 과업에 내몰려 혹사당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를까. ‘배움’− 이것은 자연스럽고 또 언제나 신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맛을 그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교육의 참모습이다. 전투에 의한 노획물이 아닌 세상을 사는 재미이고 보람이 학교교육의 실체이고 본령이어야 한다. 그 잘난 것 때문에 그 어린 아이들이 가슴을 옭죄고, 밤이 아닌 새벽녘까지 거리를 떠돌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학교 방침에 따라 날을 정해 치르는 일에 몇 명 아이들을 빼 그들을 데리고 나가 전사(戰士)가 되라고 꼬이는 것도 어른들이라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사실 대열에서 이탈한 그들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앞에서 황토 흙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공부하던 그 옛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때는 비록 경제한파가 몰아닥친 지금보다 몇 배 더 가난했지만, 애·어른 할 것 없이 다 순수하고 순종적이었기에.

그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무용을 전공하신 분이어서 봄 학예회에 대비해 율동을 가르쳐주셨고, 공동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질서를 익혀 주시려 많은 애를 쓰셨다. 그분의 진정성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학교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늦지 않게 가려고 서둘러 집을 떠나 학교로 향해 가곤 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나의 모든 생활습관이나 성향 그리고 취미 등이 그때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에게서 배운 것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의 아이들은 훗날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무슨 생각과 일을 하며 학창시절을 반추하곤 할까, 궁금하다. 마음껏 뛰어놀고 호기심으로 친구와 사귀며 진정한 사랑을 배워 실천해야 할 때, 조기 영어교육부터 성적 끌어다 쌓기, 앞선 친구 미워하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흠잡기 등 전투연습만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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