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선열들의 독립만세 함성, 하늘을 찔렀다
일본인 선생 저지 뿌리치며 초등학생들도 참가
왜경에 사전 발각되어 주암마을 앞 시위 무산

 

영암군은 제90주년 3·1절을 맞아 김일태 군수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유족, 각계각층의 군민 1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특별한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영암지역에서는 3·1만세 운동의 중심지였던 영암공원내 3·1기념비 광장과 군서면 회사정 3·1운동 기념비에서 애국단체 후손과 보훈단체 회원, 주민 등이 참배식을 갖고 헌화· 분향·독립선언문 낭독, 만세삼창 순으로 기념식 행사가 엄숙히 진행됐다.


올해는 일본제국주의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1910년 한일 합병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삼천리 방방 곡에서 우리민족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1독립만세를 외친지 꼭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 우리 영암선열들의 독립만세의 실상을 알아보고 그 얼을 새겨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편집자 주>

 

전 국민이 한마음이 되다

▲ 독립만세 재현 영암군은 지난 1일 3·1절을 맞아 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특별한 기념식을 갖고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했다. 이날 김일태 군수는 주암마을에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 매년 3·1독립운동 행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토와 주권을 강탈당하고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우리 국민들은 자괴감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곤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만 갔다. 일본이 조선은행, 조선신탁은행, 동양척식회사 등을 통해 금융권을 장악하고, 금융조합을 앞세워 지방과 농촌의 서민 금융을 통괄하면서 토지와 가산을 차압당하여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나 북간도로 단봇짐을 싸들고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에 광산·수산·산림·운수 등 모든 사업부문에서 일본인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주어 한국인과의 차별을 극대화함으로써 일본인과 경쟁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소상인이나 소기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같은 곤궁한 처지에 놓인 우리 국민들은 나라와 주권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기 시작하고 일본의 행패에 치를 떨며 저항의지를 키워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을 결성하여 인도주의, 평화주의,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권회복의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을 때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 민족정기와 쌓였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본국에서도 각계각층을 대표한 33인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공포하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독립선언서 낭독과 시위가 일어나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하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서울에서의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가 전국 218개 군에서 200여만 명이 가담하는 시위가 1천500여 회에 걸쳐 5월말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월과 4월 영암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 영암은 광주에서 장흥·해남·강진·완도· 진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 정보의 흐름을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서울과 광주에서의 3·1만세운동은 영암에 빠르게 전달되어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열혈청년들의 의기투합

▲ 3·1절 기념 걷기대회 지난 1일 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영암청년회 주관으로 3.1절 기념 걷기대회가 열려 민족의 혼을 느끼고 애국·애족·애향의 정신을 되새겼다. 한편 영암군은 이날 독립유공자 유족을 초청, 오찬을 함께하며 위문품을 전달했다.
특히 군서면 구림에서는 청년들 사이에 이심전심으로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차에 당시 서울에 유학 중이던 박규상, 최기준 등이 3월 20일경 서울 독립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와 만세운동의 생생한 경험담과 서울의 분위기를 구림청년들에게 전함으로써 구림 만세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박규상을 위시한 최민섭, 조병식, 정학순, 최기준 등 여러 청년들이 연일 간죽정에 모여 조직과 부서를 짜고 계획을 세웠으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의 인쇄문제로 계획이 지연되고 있던 4월 4일, 조극환이 구림을 찾아왔다.

조극환, 박규상, 최민섭, 정학순 등은 경찰의 눈을 피해 도갑 봉산 숲속에서 회동하여 4월 10일 오전 9시 구림과 영암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시위를 하고 그 여세를 몰아 모두 영암으로 집결하여 영암 전체의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조극환이 건네준 독립선언문, 태극기, 독립운동가를 넘겨받아 유인물의 제작은 구림에서 맡기로 합의했다.

당시 군서면 면서기였던 최민섭은 4월 6일 신근정 박찬성의 집에서 박규상, 조병식, 최기준, 김재홍, 정학순과 구림학교 학생대표 등을 소집, 회동하여 구림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계획을 설명하며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비밀 준수를 서약하고 사후 시위운동의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방책까지 강구했다. 시위에 필요한 유인물은 최민섭의 책임 하에 면서기 정학순, 김재홍 등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제작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당시 구림에는 주재소가 설치되기 이전이었다.


진압에 나섰던 경찰도 ‘만세’ 외쳐
4월 8일 밤 군서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 500매와 태극기 150매를 등사 제작하고 4월 9일 학암 김월봉의 집으로 등사판을 옮겨 독립선언문 500매, 독립운동가 100매, 태극기 등을 다량 등사했다. 이렇게 제작된 인쇄물은 구림에서 쓸 분량만 남기고 모두 정학순을 통해 야음을 틈타 영암의 조극환에게 전달되었다.

▲ 군서면 구림마을 회사정 뜰에 있는 3·1운동기념탑.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박규상은 4월 9일 구림보통학교 학생 몇 사람에게 4월 10일 9시에 회사정 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취지를 설명했다. 또한 유인물을 전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팔소리가 나면 회사정으로 모이라는 말을 암암리에 전달하도록 했다.

4월 10일 오전 9시 비상 나팔소리를 듣고 회사정으로 모여든(비상 나팔소리가 나면 평상시에도 마을에 중대사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나팔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이는 것이 관례였다.) 300여 명의 주민과 수업을 거부하고 모여든 여러 학생들 앞에서 박규상이 엄숙하게 독립선언문 낭독을 했다. 그리고 조병식과 최기준이 연단에 올라 “다 같이 독립만세를 외칩시다”며 만세를 선창하자 모두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했다. 이 만세 소리는 마을을 넘어 들과 산으로 메아리치며 울려 퍼져 나갔다.

구림보통학교에서는 수업을 받기 위해 운동장에 도열해 있던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려고 하자 선생님들이 만류하여 교실로 들어갔으나 수업이 될 리 없었다. 정상조·조희도·박성집·박흔홍 등이 교실을 돌며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함께 할 것을 권유하고 종을 난타하였다. 학생들은 일본인 선생들의 저지를 뿌리치고 창을 뛰어 넘어, 모두가 만세시위에 합류함으로써 시위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를 감시 진압하기 위해 나와 있던 조선인 순사마저도 군중들이 모자를 벗기고 만세를 강요하자 상의를 벗어 던지고 만세시위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사람도 구경하던 사람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 몸이 되고 한마음이 되어 ‘만세, 만세’를 외치니 그 수는 1천여명에 이르고 그 기세는 번져가는 들불과도 같았다.


숨바꼭질하며 만세운동 전개
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가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독립 만세시위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신근정을 넘어 영암으로 향하던 중 영암에서 출동한 다수의 무장 헌병·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당시 영암 동북권과 군서 서부권 양대 지역의 중심부인 주암마을 앞에 모여 독립 만세운동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이들은 거사 날을 4월10일 영암읍 장날로 정하고, 읍내와 구림리 학생 주민이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암지역은 일본경찰의 사전 저지로 주민들의 이동이 불가능했고 주동자들은 왜경에 모두 잡혀갔다.

다시 회사정으로 되돌아온 시위대는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그 때 구림천에 냇물이 많이 흘러 노두(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시위대와 순사가 대치하면서 정상조 나팔수는 대담하게 나팔을 불어대며 순사가 쫓아오면 건너편으로 건너가 나팔을 불고 또 쫓아오면 반대편으로 건너가 나팔을 부는 숨바꼭질식 만세시위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경찰에 정상조가 체포됨으로써 만세시위는 오후 5시 경에야 끝이 났다. 아쉽게도 영암에서는 시위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모자들만 검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격렬하고 열화와 같은 시위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에 가담했던 100여명의 많은 주민들이 영암경찰서로 끌려가 온갖 신문과 고문을 당했다. 이 독립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장흥지청으로 송치되어 1919년 5월 15일 박규상 징역 2년, 최민섭 1년6개월, 조병식·최기준·김재홍·정학순 등은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대구고등법원으로 상소했다. 정상조·조희도·박성집·박흔홍은 태형 90대에 처하는 판결을 받거나 벌금형을 받았다.

특히 박규상은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향으로 오는 도중 서호강 선상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운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구림이 보이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그의 고향사랑과 더 나아가 나라사랑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안타깝고 숙연해진다. 이날의 독립 만세시위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구림 회사정 뜰에 기념탑이 건립됐다. 

구림찬가
여기는
이 나라 이 겨레의 자주와 독립
맨주먹으로 외친 구림의 젊은이들
삼일 만세
핏발이 서린 곳
보아라
저기 월출 영암의 드높은 기상
낭주골에 뻗친 찬연한 햇살
비둘기 떼 날개 치며
창공에 치솟으니
박사 왕인이 누구던가
국사 도선이 누구던가
예서 나고 예서 배우며 예서 자랐구나.
오, 자랑스런 내 고장
천추만대 빛나는 예지와 총명
자자손손 이어온 우국과 충절
우리는 이 나라의 불기둥이로다.
우리는 이 민족의 큰 태극이로다.
대동계 한마당
회사정 뜨락에
그 날 만세 소리 다시 살아나니
구림의 젊은이여, 영원하라.
구림의 젊은이여, 영원하라.
서기 2001년 4월 10일 낭주후인 최승호 헌시


*참고문헌 ; 호남명촌 구림
한국독립운동사사전제5권(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찬)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13집(국사편찬위원회 편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 저 남만성 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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