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근(본사 대표이사 · 발행인)
세월이 갈수록 다산(丁若鏞:1762~1836)의 학문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하다. 그 중에서도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가 국내에서는 독보적이다. 다산연구소가 풀어쓴 ‘다산이야기’ 한 가지를 옮겨보자.

1801년 신유교옥(辛酉敎獄)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정승의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위세를 부린 서용보(徐龍輔 : 1757-1824)라는 사람과 다산과의 악연에 대한 얘기다.

이 사연을 보면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고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정조의 죽음으로 벽파가 집권하자 시파이던 다산 일파들은 몰락하는데, 모든 대신이나 재판 관여자들이 다산을 석방하자고 했으나 벽파로 권력의 절정에 있던 서용보가 우기는 바람에 다산은 석방되지 못하고 멀고 먼 귀양지에서 18년을 보내게 된다.

다산이 암행어사이던 시절에 경기관찰사로 잘못을 지적당했던 서용보가 그때의 앙심으로 보복을 한 것이다.

1803년에는 조정에서 강진에 귀양 사는 다산을 해배하자는 논의가 익어갔으나 당시 좌의정의 높은 지위에 있던 서용보가 결사반대하여 또 해배되지 못하고 말았다. 1818년 서용보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야 다산은 18년 만에 겨우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때 다산의 고향 근처에 퇴임하여 살던 서용보는 사람을 시켜 다산을 위문하고 오랜 귀양살이를 위로하는 일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서용보는 오래지 않아 신하로서는 최고 지위인 영의정에 올라 다시 조정으로 들어간다. 1819년에는 그 전해에 귀양지에서 돌아온 다산을 재등용하여 나라에 도움을 주게 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승지(承旨) 벼슬에 임명되려던 때에 또 다시 서용보가 극력 반대하여 다산은 다시 벼슬길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다산이 애초에 귀양살이를 떠나지 않았거나, 유배초기에 바로 풀려났다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를 알 길이 없다. 또 해배 뒤 바로 벼슬길에 올랐다면 어떤 변화가 도래했을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영의정이던 서용보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지만 그렇게 핍박받은 다산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로 역사 위에 우뚝 떠있다는 사실이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력을 잡아 세상을 요리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무한정하지만, 그러한 권력도 한때,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해지고 무상한 것이 권력임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미공개 유물 17점이 최초로 공개됐다. 강진군은 18일 강진군청 소회의실에서 다산 선생이 제작한 한반도 서남부 지도와 친필 서한 등 미공개 유물 17점을 공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유물은 요조첩(窈窕帖), 윤시유 서간, 정학포 서간 등 친필 서간과 보정산방, 자휘서간, 월출동천 등 17개 작품으로 다산의 삶과 정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경세가(輕世家)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개혁정신과 인간 사랑의 정신, 실시구시(實事求是)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두고 두고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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