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근(본사 대표이사 · 발행인)
성난 농민들이 또 길거리로 나섰다. 트랙터를 몰고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쌀 협상’ 무효화 하고 국회비준을 반대하라는 절규가 월출산에 까지 메아리 쳤다. 앉아서 그냥 당할 수만 없다는 처절한 몸부림이 지역 국회의원 연락사무소까지 이어지고 있다. 벌써 나흘째다.

비단 이 지역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논·밭에 심어진 작물을 갈아엎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메아리는 온데간데 없다.

“쌀농사를 그만두면 뭣하란 말이냐”고 울부짖어 보지만 누구하나 명쾌한 대답이 없다. 머리 써 밭작물에 손을 대보지만 역시 낭패다. 원인은 과잉생산이다. 이리저리 헤매도 갈 곳이 없다. 이를 두고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했던가. 하늘이 무심할 뿐이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3농(三農) 정책을 주창한 바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정치·경제·군사·철학·법률·천문·지리·역사 등 거의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다산. 그는 생전에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미 ()년전 그가 중시한 3농정책은 무엇인가. 첫째 편농(便農)이다. 힘들고 고단한 농사일, 어떻게 해야 편하고 쉽게 농사를 지을 것인가를 염두에 뒀다. 농업의 기계화를 통해 노동력의 합리적인 운영 등으로 농정의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둘째는 후농(厚農)이다. 착취체제의 온갖 불합리한 제도를 고쳐 농민들의 수입이 후한, 즉 소득의 증대를 도모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세 번째는 상농(上農)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사회에서 선비 못지않은 신분으로 농민들의 지위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다산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정확히 분석하고 검토하여 문제점을 바르게 파악해서 그 치유책을 눈물겨운 호소처럼 제시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걸친 호란으로 인구가 크게 준데다 유민까지 발생했다. 또 농경지의 대량 감소로 농업생산이 현저히 줄어 백성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에 처했다. 봉건 지배자들은 사회 질서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농민에 대한 약탈과 토지의 겸병을 강화했다. 이처럼 붕괴 해가는 경제 기초를 복구하기 위해서 조선은 우선 봉건사회의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봉건 통치자들은 국가의 위기는 돌보지 않고 토지 겸병과 권력 쟁탈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산은 3농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비실용적인 농업정책을 실용적으로 제시한 일대 개혁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농업 진흥책이야말로 나라를 건지고 백성을 살려내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는 논리였다.

오늘날, 한국의 농업과 농민들의 처지도 그 때 이상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FTA가 뭐고, DDA가 뭔지 모르지만 쌀이 수입된다니 청천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하나둘씩 빗장이 풀리더니 급기야 생명줄인 쌀까지 수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희생만 강요당하고 살아온 것도 분통이 터질 일인데, 목숨까지 죄는 형국이니 가만히 앉아 당할 자 누가 있겠는가.

편농·후농·상농의 3농정책을 제대로 펼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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