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렬·군서면 출신·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정치학 박사)·동아일보사(동아방송) 기자-여성동아부 차장·동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학과장·가천의과대학교 경영대학원 원장
문화산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미국사회에 세계최초의 테마파크 개념을 도입한 디즈니랜드를 세워 놀라운 문화적 충격을 준 월트 디즈니는 근대적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비조(鼻祖)격이라 할만하다. 세계 어린이들의 꿈과 미래를 미국적 문화로 바꿔놓은 미국 동심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디즈니랜드를 건설하여 1950년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뛰어난 창조정신을 발휘해 글로벌 기업인 디즈니사의 기반을 마련한 그는 특히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큰 성공을 거둔 미국적 문화주의의 선구자였다.

당시만 해도 공원은 어린이 놀이기구나 동물원 등 볼거리 중심의 산책코스로 인식되던 기존 개념을 뒤집고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즐기는 테마파크란 컨셉으로 미국인들에게 여가와 휴식을 주는 꿈과 환상의 테마파크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상품을 내놨던 것이다.

1901년 12월 5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미조리주 농장에서 성장했던 월트 디즈니는 어린시절 미술에 관심을 가져 7살때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군입대를 거절당한 그는 적십자에 가입해 외국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1년간 병원 구급차를 몰거나 적십자 고위직들의 운전사로 일하며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전쟁터에서 고향에 돌아와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취직했지만 한달만에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됐던 그는 1922년 일생일대의 동지 어브 아이윅스와 함께 ‘래프 오 그램’이라는 회사를 설립, 단편 만화영화를 제작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해 만화가와 만화영화 제작자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련 앞에 굴복하지 않고 또 도전했다.

고향에서 파산한 뒤 그는 할리우드로 나가 형 로이와 손 잡고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를 세워 ‘행운의 토끼 오스월드’와 ‘앨리스 시리즈’를 힘겹게 성공시켰지만 배급상들의 농간으로 캐릭터를 뺏기는 수모를 겪었다. 월트 디즈니프로덕션은 32년 미키마우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총천연색 만화영화를 최초로 제작, 5년 뒤부터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내세워 3편의 장편 만화영화와 120편의 만화영화를 제작했다. 백설공주,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 만화영화를 제작해 성공한 그는 1955년 디즈니랜드를 완성했으며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세계최고 관광지의 하나로 지금도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월트 디즈니랜드는 월트의 꿈이 총망라된 세계최초의 테마파크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애너하임에 개장, 최근까지 대통령, 왕과 여왕들을 포함 2억5천만명이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간 입장자가 1천만 명을 넘고 그 중 70%가 어른이다.

바깥 둘레를 산타페 철도가 돌고, 유원지 안에는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을 재현한 ‘메인 스트리트 USA’를 중심으로 ‘모험의 나라’, ‘개척의 나라’, ‘동화의 나라’ 등 7개 구역이 테마별로 배치되어 있다. 그 중 모험의 나라는 큰 나무들이 울창하고 강물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열대정글로 스릴 넘치는 모험을 즐길 수 있다. 또 개척의 나라에서는 서부극의 복장과 증기선, 골드러시 현장 등을 볼 수 있다. 미래의 나라에서는 공상과학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성공비결로 4C, 즉 호기심(curiosity), 자신감(confidence), 용기(courage), 그리고 항상성(constancy) 등을 강조했던 월트 디즈니는 관광수지 적자가 2007년 7조원에 달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J프로젝트 등 관광클러스터를 구축하면서 영암주변에 많은 테마파크들이 조성될 예정인데, 영암이 낳은 월트 디즈니 같은 영웅이 빨리 출현하길 대망(待望)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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