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帆船) 형국을 이룬 명당 터농수산물 운송해로 ‘배날리’ 포구

 

월출산 묏줄기 힘차게 뻗어서

웅장한 이 고장 우리 영암교

희망의 종소리 오늘도 울리니

반딧불 흰눈에 우리 공 다하세.

 

좌청룡 자락에 둥지 틀어 

범선(帆船)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 망호리는 범선의 돛대 역할을 하여 순풍을 받아 항해를 할 수 있다하여 지금도 솔밭을 조성, 보존하고 있다. 지난해 조성된 정자는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청백리 교육자 박기수 교장이 작사 작곡하여 불러왔던 영암초등학교 교가의 1절이다. 영암읍을 중심으로 한 모두는 영암의 진산(鎭山) 월출산의 정기를 받아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하며 살아왔다.

 

9천만 년 전, 중생대 화산활동 때 펄펄 끊는 맥반석 용암이 갖가지 모양으로 해석도 구구한 용(龍)을 이루어 몇 갈래로 뻗어 영암을 보듬고 있다. 지적도상 영암읍 회문리 산26-3번지, 개신리 산89-2번지인 천황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은 좌·우로 갈려 좌청룡, 우백호로 뻗쳐있다. 이 울타리 안에 영암읍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고려 때로 여겨진다.

 

이후 영암읍 주변까지 차츰 마을이 들어선 듯하다. 당시는 영암읍 시가지 주변까지 바닷물이 들고나며 차츰 갯벌이 드러나고 늪지가 생겨났다. 월출산 아래 냇가를 타고 차츰 흙, 모래가 쌓이면서 산기슭과 둔덕 숲쟁이를 기대고 산 사람들이 들(野)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이다.

 

천황봉 중심에서 꿈틀거리며 용트림 치며 내리친 용이 영암공원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감싸고돌아 둔덕과 성터를 이루어 북하늬바람을 갈무리진다. 성터 정 북쪽에서 시작한 지용이 북쪽으로 뻗어 좌·우로 달리는데, 좌청룡 자락에 망호정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범선(帆船) 형국을 이루고 마을 앞에는 예로부터 비보풍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솔밭(松田)을 조성하여 나무가 무성해야 범선의 돛대 역할을 하여 순풍을 받아 항해를 할 수 있다하여 마을에서는 지금도 임야로 보존하고 있다. 영산강 하구둑이 축조되기 전까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올라와 호수를 이뤘으며, 호수를 바라본다는 뜻[바랄 망(望), 호수 호(湖)]을 따서 정자이름을 ‘망호정’이라 불렀다.

 

조선조 이전에는 망호리 등 너머에 역(驛)이 있었고, 역의 말을 관리하는 곳이라 해서 마구정(馬具停)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경주 이(李)씨 25대손인 호암 치신(致信)은 무과 출신으로 명종 때 선전관으로 있다가 정미사화 때(1547년)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고양에서 남하했다. 그는 자자손손 번창할 수 있는 이 명지에 감탄하여 터를 잡고 마을 앞 늪지와 갯벌을 일구며 옥토로 만들고 교화에 힘썼다. 향약을 만들어 실천하였고, 1629년 이조 병조참판 이주남(李柱南)이 망호정을 건립하였으며, 무암 송시열은 이를 높이 사 친필 현판을 걸게 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한 후손들은 대대로 힘을 쏟아 서당을 마을 뒤쪽과 남쪽 두 곳에 세워 후학을 길러왔다. 이 마을은 올해 농협중앙회로부터 ‘1사1촌’ 자매결연 우수마을로 선정돼 시상금으로 받은 2억원을 남쪽 신서당(재) 개축과 주변 조경사업에 투자, 선조의 얼을 계승할 꿈에 부풀어 있다.


-부춘정 건립해 강학활용-

망호정 마을의 서북쪽에는 후정·배날리 마을이 연이어 서로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앞 문전옥답을 지나면 넓은 논이 펼쳐지고 둔덕 같은 동산이 있다. 이 동산을 휘감아 시내가 물목을 이루면서 빠져 나간다. 웬만한 가뭄에도 그치는 법이 없는 맑은 물길은 동산에 올라서 보면 감돌아서 천렵이나 화전놀이를 한 큰 강으로 들어가고, 멀리 비단 장막을 펼친 듯 빼어난 산이 구름 속에 가물거린다. 해로로는 농수산물을 수송하여 자연스레 포구가 생겨 배날리가 되었다.

 

이 마을 역시 ‘풍선 배’ 형국이므로 마을 안에는 먹는 샘을 팔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동 샘을 조성하여 이용해왔다. 이 마을에서도 풍선 배 형국에 맞추어 돛대 역할을 할 나무로 포프라 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서 있고 중심지 가정집 둘레에도 150~200년생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보존하고 함부로 훼손하면 재앙이 따른다고 믿고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연적봉은 노적봉으로 비보하며, 300여년전 후정마을에 입향한 진주 강(姜)씨의 청암(淸菴) 한종이 부춘정(富春亭: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4호)을 건립하여 강학공간으로 활용했다. 당시  이곳의 수려한 풍광을 찾은 시인 묵객들은 많은 판액을 남겼지만, 지금은 몆 점만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이곳 부춘정도 곧 개축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영암읍 성터 북문쪽 백년등에서 300m쯤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망호정과 후정·배날리로 내려가는 갈림길 부근에 도로가 잘려나간 흔적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어천자가 천문 지리학자로부터 별자리를 살펴보니 조선국은 중국을 능가하는 인걸이 많이 배출되어 끝내는 동양 제일국이 될 풍수지리를 갖추었으므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건의를 받고 우리나라 곳곳을 훼손했는데, 이중 하나가 그곳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국이 획책했던 국토훼손과  일맥상통한 이야기로, 백성들의 기를 꺾어 싹을 자르는 술책이라는 점에서 씁쓸할 뿐이다.<계속>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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