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촌 마을 전경 ‘개미들이 모이는 마을’이란 뜻을 갖고 있는 회의촌은 마을 이름대로 초·중·고등학교를 비롯 군부대, 어린이 집 등 영암읍 관내 각급 기관들이 집결돼 있다.
영암읍 월출산 기슭에 자리한 회의촌은 줄여서 회촌이라고도 한다. 행정 구역명은 회문리 2구다. 모일 회(會), 개미 의(蟻), 마을 촌(村)해서 회의촌이다. 즉 ‘개미들이 모이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을이름에서 보여주듯 개미떼와 같은 다중의 집합소가 집결돼 있다. 영애어린이집, 영암영애원, 영암초등학교, 영암중학교, 영암고등학교, 영암군부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약 70년 전까지는 마을입구에 수백년 된 노송들이 천변에 쭉 들어서 여름철이면 들일을 마친 마을사람들이 이곳 그늘진 곳을 찾아 낮잠을 자곤 했다.

또한 마을 주변에는 송림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山深 夜深 客愁心’(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설움 또한 깊구나)을 노래한 김삿갓의 시상(詩想)을 맺히게 할 만한 풍치를 갖춘 마을이었다. 하지만 1943~1945년 무렵,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때 전함을 만들기 위해 모두 벌목해 버렸다. 송림이 없어진 후 주민들은 “회촌이 폐촌(廢村)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했다.

이 마을에는 2가지 재미있는 웃음거리가 오랫동안 전해왔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언제나 술에 만취해 귀가하는 김영감이 여느 때처럼 늦은 밤에 대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외쳐 댔다. 식구들은 얄미워 골탕 좀 먹이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은 사이에 뒤쫓아 왔던 호랑이가 영감님의 궁둥이 한쪽 살을 떼어 삼켜 버렸다. 궁둥이 한쪽을 잃은 영감님이 “나 죽는다”고 소리치는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놀란 가족들이 뛰쳐나와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김영감을 ‘반쪽 궁둥이의 영감님’이라고 비꼬았다. 남한 땅에서 본 마지막 야생 호랑이는 1929년 영광 불갑사 부근에서 죽어 발견된 호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반쪽 궁둥이의 영감님’의 이야기는 100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다.

두 번째는 박씨의 이야기다. 어느 날, 깊은 밤중에 “불이야! 불!”하는 동네 사람들의 함성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박씨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방안에서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벌써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 골목에서 물동이를 들고 모여 들어 시냇가에서 박씨 집까지 두 줄로 늘어서서 물을 날라 왔다. 바통받기 식으로 운반된 물은 맨 앞쪽에서 불을 끄고 있는 박씨에게 운반되었다. 박씨는 빈 물동이를 옆 사람에게 넘겨주고 땅에 놓인 물동이를 집어 들어 불속에 뿌렸다. 이때 일부 남자들은 지붕(마람)을 걷어 내고 또다른 사람들은 냇가에서 물을 퍼 올려 주는 일을 했다. 이 때문에 박씨 곁에 늘어 선 사람은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박씨가 땅 바닥에 놓인 물동이를 몸을 구부려 들어 올릴 때마다 성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물동이를 들어 올리려고 몸을 구부릴 때마다 소중한 남자의 밑천이 온통 드러나 보이니 옆에서 물 나르는 부인들이 난처한 일이었다. 잠결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올 때 자기 아내의 고쟁이(밑이 터진 여자의 속옷)를 바꾸어 입고 나온 것이었다. 혼이 나간 박씨는 “아이고! 내 집!” “아이고! 내 집!”하고 물을 받아 들어 올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면서 앉았다 섰다를 수백번 되풀이 했다. 앉을 때마다 그 주요부위가 나왔다 들어갔다, 고쟁이가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반복했다. 옆에서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었던 부인들은 그 얼마나 무안했을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아내의 고쟁이를 바꾸어 입고 나오다니…” “아이고 내 집! 아이고 내 집!”하고 비꼬는 놀림 말은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의 입을 떠나지 않았다.

궁둥이 반쪽이 호랑이에게 먹혀 없어진 ‘반쪽짜리 궁둥이의 영감님’과 자신의 주요 부위를 본의 아니게 부녀자들 앞에 내놓았던 박씨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은 여느 마을과 흡사한 가난한 농촌이었다.

그러나 한때 부자들 가운데는 김용선씨(지금의 영애어린이집)가 1천석, 박용삼씨(지금의 영애원집)가 1천석, 그리고 바둑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훈현씨의 할아버지 조숙환씨가 7백석, 박경완씨(박강철 조선대 교수의 조부)가 5백석지기 부자로 이른바 지주였다. 나머지 대다수 주민들은 소농 또는 남의 농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들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이 마을에서는 봄과 여름에 마을 앞산에서 유산(遊山:산 놀이)을 했다. 이때는 음식물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먹고 춤추며 놀았다. 소요경비는 주로 지주들이 추렴하였고 조훈현의 할머니가 주관해서 행사를 꾸렸다.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할머니가 때 묻은 수건에 싸가지고 온 찜밥을 형제끼리 더 많이 먹으려고 다투기도 했다. 수건에 달라붙은 마지막 한 톨의 밥알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었던 시절을 지금 어린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면서도 오늘날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계속>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조동현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