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종 화      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生​​​​​ ​​​​​​전1군단장(중장)​ ​​전 병무청장​ 경기도 안보자문위원
모 종 화      
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生​​​​​​
​​​​​​ ​​​​​​전1군단장(중장)
​ ​​전 병무청장
​ 경기도 안보자문위원

남자들은 오랜 친구들과 술 한잔하게 되면 빠짐없이 군대 이야기를 한다. 군번을 대조해 가며 서로 선임이라고 우기는 일도 있고, 본인이 군 생활할 때 최고였다고 무용담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장군이 되면 달라지는 것이 100개 이상이라고 아는 척하기도 한다.

군 생활을 통해서만 느끼는 달콤한 추억 속에 얽힌 특별한 숫자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대한민국 군인의 군번 1번은 누구일까? 창군 당시에는 장교들만 군번이 있었다. 장교 군번은 5자리로 1000*인데 과연 10001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초대 육군참모총장의 사위인 이형근 대장이다. 본인이 1번을 달지 않고 당시 사위에게 1번을 부여한 이유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당시 1번을 달기 위해 서로 다툼이 있었을 법도 하다. 과거나 현재도 병사의 군번은 8자리로 군번을 보면 10-76000130처럼 입대 연도와 육군, 입대한 훈련소, 입대순서가 있어 군대에서 선배·후배 논쟁은 군번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장교들의 군번에도 얽힌 사연이 많다. 장교 군번은 임관할 때 성적순으로 군번이 부여되기 때문에 그동안 숨겨왔던 본인의 사관학교 성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장교들은 교육받을 때 아파트를 성적순으로 배정하는데 아파트 호수를 보면 금방 성적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성적순 군번이 없어져 군번을 보아도 성적을 알 수 없으니,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병사들의 봉급 이야기이다. 2024년도 병장 봉급은 125만 원 정도이다. 아마, 200만 원 시대가 곧 올 것 같다. 오래전에 군 생활을 하신 어르신들께서는 1980년에 3천800원 받다가 2000년 이후 1만 원대로 인상되었다는 현실에 깜짝 놀라기도 하신다. 지금은 전역할 때 적금까지 포함하여 약 2천만 원의 씨앗자금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요즘 병사들은 군 복무를 얼마나 할까? 병사로 군에 오면 6·25 이후 36개월 동안 복무하였으나 차츰 안보 상황도 고려하고, 특히 선거 때마다 젊은이들의 표를 의식하여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18개월 근무하고 있다. 병사들의 복무기간이 줄었다가 늘어난 때도 있었는데 1968년 북한 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사건 이후 병 복무기간이 33개월에서 36개월로 늘어난 일도 있었다. 아마, 지금 다시 복무기간을 늘린다고 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엄청난 반대가 있으리라 본다.

병역법상 대한민국 건강한 남성은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만 19세가 되면 소속된 지방병무청으로부터 병역판정검사 대상자로 통보가 온다. 이제 우리 아들이 성장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게 되어 뿌듯하기도 하지만 현역으로 가는지, 보충역으로 가는지 걱정되기도 한다.

과연 병역판정검사(종전의 신체검사) 등급은 몇 등급으로 구분될까? 현역인 1등급~3등급부터 면제까지 7등급으로 분류되며 종전에는 학력의 제한이 있었으나 지금은 신체 등 자격요건만 되면 학력과 관계없이 모두 병역 대상이 된다.

장군 달면 달라지는 게 100개 이상? 장교는 소위에서 대장까지 10단계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 필자는 마지막 계단을 넘지 못하고 9번째 단계에서 주저앉았지만, 후회는 없다. 흔히들 장군 달면 달라지는 게 100개 이상이라고 아는 체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복장, 모자, 신발, 허리띠 등 40여 개 정도 달라지지만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지휘관으로 보직 시에는 전속부관, 공관병이 생기고 장군 지휘봉과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삼정도와 수치 정도이다. 하지만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은 100개보다 훨씬 무거울 정도이다.

필자는 35년 야전 생활 중 얘들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 아빠 따라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 학교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이사를 32번 정도 하여 자라난 고향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종종 전국의 사투리는 많이 아는 편이라 초등학교에서 받아쓰기할 때 지방의 사투리에 익숙하여 혼란을 겪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최전방 철책에서부터 진해, 광주, 화천, 김포, 파주, 동두천까지 조국의 산야를 밟고 북쪽만 바라보며 살아온 군인으로서 비록 개인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속에서도 부모 형제를 지키고자 지내온 청춘의 발자취가 뿌듯하기만 하다.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온다고 한들 내 나라 지키는 국방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리라고 오늘도 老兵은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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