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출생​​​​​​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전 목포 석현초 교장
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출생
​​​​​​ 전 목포시 교육장
​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 전 목포 석현초 교장

학파농장은 내가 사는 곳에 있는 대단위 농장이다. 정확히는 1934년 7월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가 부친인 현기봉의 호에서 따온 학파(鶴坡)에 농장을 붙어 합명회사 형태로 설립등기를 마친 법인 명칭이다. 그러나 나는 영암군 군서면과 서호면 사이에서 내 눈 앞에 광활하게 펼쳐지는 논을 학파농장이라 이해하고 있다. 

내 유년 시절이었던 절대빈곤의 시절, 만일 학파농장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학파농장을 돛단배 삼아 지랄 같은 세월의 강을 건너는 민초들은 아마 강물에 휩쓸려 부초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피난와 새마을에 둥지를 튼 실향민들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고, 학파농장에 의지해 살아가는 농군의 아들이었던 나 역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파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작은 마을이 커지고 없던 마을이 생겨났는데, 서호동, 학파동, 남하동, 무송동, 신기동, 백암동이 그런 마을이었다. 그 때 황해도 옹진군에서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실향민들도 내가 사는 마을 아시내 옆 호숫가에 새마을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살게 되었는데 순전히 학파농장이란 기댈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파농장은 우리들의 피와도 같았다. 학파농장에서 거둔 쌀과 보리로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비도 학비도 마련했다. 또 그 논에서 거둔 볏짚으로 지붕도 이고,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만들고, 아궁이에 불도 지폈다. 특히 실향민들에게는 학파농장은 생명줄 그 자체였다. 그들은 다루기 어려운 갯논을 지극정성으로 다루어 식량이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초겨울까지 눈발을 맞으며 일이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질서정연하게 한 두둑씩 맡아 쟁기로 걷어 올린 단단한 흙덩이를 괭이로 잘게 부숴 보리씨를 파종했다. 여름이면 군사작전을 하듯 수십 명씩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보리를 거둬들이고 모내기를 하고 김을 매고, 가을이면 벼를 베어 지게로 져 나르는 모습은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빠진 논으로 보리를 도저히 갈 수 없는 곳도 있었지만 그들은 뺀한 곳이 없이 보리를 갈았다. 그래 그 갯논은 실향민들이 흘린 땀방울과 눈물방울로 항상 젖어있었다. 

학파농장은 현준호가 1939년 일제로부터 공사권을 따내 1940년 4월부터 공사에 착수, 1944년 5월 서호면 성재리부터 군서면 양장리까지 이르는 1.2㎞ 제방공사를 완성했고, 해방 후 셋째 아들인 현영원이 간척공사를 완공해 1962년 10월 26일 농림부로부터 준공인가를 받았다. 용수원인 학파저수지도 82만㎡로 준공되었는데, 간척지 규모가 무려 270만 평에 이르렀다. 학파농장은 소작료가 30%였으나 실제로는 20%를 밑돌았다. 매년 작황을 조사했으나 실제보다는 낮게 책정했고, 이모작 작물은 소작인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토지 점유권을 인정해 주었고 점유권을 사고팔 수도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 1988년도에 소작쟁의가 벌어졌다. 소작쟁의 운동원들은 1962년 행정적으로 완공된 점을 들어 결과적으로 1944년부터 1962년까지 18년 동안은 등록도 되지 않은 농토에서 소작료를 걷었으므로 무상이득을 취한 것이라며 무상양도를 주장했다. 소작인들은 소정의 쟁의경비를 분담했고 우리 집 역시 그런 흐름에 순응했다. 그러다 결국 7년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1995년 소작인들이 평당 6천500원에 매수하되 정부가 우선 변제해주고 소작인들은 20년 동안 분할 상환을 하기로 해 소작에서 자작으로 해결됐다. 그 때 쟁의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청년 농부였고 아시내에도 새마을에도 핵심 청년이 있었다.
새마을의 경우 소작이나마 부쳐 먹을 땅이 있었던 실향민들은 갯논 농사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거나 부족했던 실향민들은 용수원으로 만들어놓은 학파저수지에서 물고기나 새우를 잡아 연명을 해갔다. 그 신새벽 물안개 자욱한 호수 위에서 낙엽 같은 양철 배에 의지해 고기를 잡아 올리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실향민들은 항상 신새벽이면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은 삼팔선으로 모내기를 하러 간다는 말을 주고받기에 나는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라 북한이 바라다보이는 삼팔선으로도 모내기를 하러 간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학파농장 논 삼십팔선 근방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피식 웃기도 했다. 그 드넓고 안개 자욱한 학파농장의 새벽종은 실향민 그들이 울리고 있음을 난 어린 시절 항상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실향민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월출산에 떠오르는 신새벽부터 은적산으로 가라앉은 초저녁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그 한 가운데 공양미 4만석, 학파농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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