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5]
■ 구림마을(34)

군서면과 서호면 간척사업 연혁: 1. 진남제- 1540, 월당 임구령 2. 모정저수지- 1941, 일제강점기 3. 서호간척사업-1943, 무송 현준호

심의철 군수 선정비

원머리 둑에 세워져 있는 군수 심의철의 선정비
원머리 둑에 세워져 있는 군수 심의철의 선정비

원머리는 양장마을에 속하는 지역이다. 임구령 목사는 이 원머리에서 동호리까지 제방을 쌓아 지남들을 만들었다. 바로 오중스님의 살신성인 전설이 깃든 진남제이다. 450년 전 당시에는 흙으로 된 토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수가 지면 흙이 유실되어 둑이 무너지거나 넘치는 일이 많았다. 동호, 모정, 양장마을 주민들은 장마철이 되면 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머리에서 살았던 고 최석준 옹은 2009년 필자와 대담 중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옛날에는 모정, 동호, 양장에 사는 주민들이 제방을 3등분해서 울력을 했다. 장마가 지면 3리 사람들이 모두 부대를 들고나와서 흙을 채워 제방을 보수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게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라서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심의철이란 분이 영암군수로 왔다가 이것을 보고 영암군민을 동원하여 제방을 튼튼히 보수하였다. 모정, 동호, 양장 3리 주민들은 심 군수의 선정에 감동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그 뒤 일제 강점기 때, 한 일본인이 석축을 쌓아 지남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심 군수 선정비는 원머리 최석준 옹 집 바로 곁에 지금도 남아있다. 위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 석비다. 군수 심의철은 1881년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883년에 파직당했다. 석비는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씨가 분명하지 않다. 이 비문에도 3리(三里)라는 어휘가 나온다. 당연히 모정, 동호, 양장 세 마을을 일컫는 말이다. 해독 가능한 비문은 다음과 같다. 

郡守 沈侯宜哲 善政碑  (군수 심후의철 선정비)
郎府南鎭 役灌三里 (낭부남진 역관삼리)
0佔海濱 財0十畓  (0점해빈 재0십답)  
疏通00 林公報積 0000 (소통00 임공보적 0000) 
0濟00 000新 (0제00 000신)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조성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해주는 전설이 지역에 두 가지 전해오고 있다. 월당 임구령 목사가 1540년 양장리 원머리와 동호리를 잇는 제방(진남제)을 쌓는 일과 관련된 전설이다.

진남제의 미인계
“임구령 목사가 구림에 정착하고 보니 주변에 논이 없어. 평리 쪽 논이 일부 밖에 없고, 기껏해야 구림 돌정재 아래 뜰 쪼금 있고 다 바다야. 당시 사람들은 서호 바다에서 난 해산물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고 오히려 농산물이 귀했어. 그래서 임 목사는 바다를 막아 간척사업을 하기로 했어. 당시는 돌도 손으로 나르고, 지게나 우마차가 그나마 장비라면 장비였제. 어마어마한 인부를 동원해서 밥 먹이고, 술 믹이고, 인건비 줘 감시로 몇 달을 해도 크게 진척이 없어. 그도 그럴 것이 뚝방 막는 것이 돌이나 흙인디, 그것이 얼마나 무거워.
‘이러다 가산을 다 들여도 모자라겠다’싶은 임 목사가 특별한 응원을 준비했어. 임 목사에게는 예쁜 딸이 셋 있었는데 아끼고 아낀 두 딸을 불러 인부들을 돕도록 했어. 양쪽 뚝방이 시작되는 곳에 막걸리 항아리를 갖다 놓고 흙더미를 부리고 나오는 인부들에게 막걸리 한 잔과 안주를 먹도록 했어. 완전 미인계지. 달덩이처럼 예쁜 부잣집 낭자가 따라주는 술잔을 서로 한 잔이라도 더 마실라고 인부들의 발걸음이 빨라졌어. 하루 열 번 갈 것을 열다섯 번 가고 한께, 일 진척이 빨라졌어. 그때 거그서 인부들을 격려했던 두 딸 중에 한 분이 후에 고죽의 부인이 된 분이요. 그랑께 그 미인계 덕분에 어마어마한 간척지 논이 생겨서 이곳 사람들이 더 잘 먹고 살게 된거여.”
<출처: 영암문화원 설화집 군서면 편>

진남제 오중스님 살신성인 이야기
                구술 박찬환(군서면 지남마을)
모정마을 앞으로 일명 ‘지남들’이라고 불리는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다. 이 지남 평야는 지금부터 약 450년 전에 나주 목사를 지냈던 임구령이라는 분이 지휘하여 동호리에서 양장 원머리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이다. 이 제방을 진남제(혹은 지남제)라고 한다. 조선시대 1530여년 경 나주목사를 지낸 임구령이란 분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양장리와 동호리 사이의 물목이 수 백간(수백 미터) 밖에 안 되어 보여서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 결심을 했다. 거의 제방을 다 쌓고 마지막 물막이 공사만 남았는데 물살이 세서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 물막이 공사를 할 때 스님 다섯 명을 생매장하면 둑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튿날 공사 현장에 나가서 한탄했다. “노인이 꿈에 한 말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재산도 다 털어 쓰고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한단 말인가?”라며 포기 상태로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나타나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임 목사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는다고 한탄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이 “백성을 위해 나라님도 못하는 좋은 일을 하시는데 부처님인들 어찌 방관하시겠습니까? 소승은 지남마을 진남사에서 불도를 닦는 오중이라는 사람입니다. 몇 월 며칠에 물막이 공사를 할 수 있게 준비를 하시면 소승이 와서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 말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용기백배하여 있는 힘을 다해 공사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그날이 오자 약속한 대로 스님이 나타나서 물 빠진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돌망태와 흙무더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안타깝게도 스님이 자갈에 미끄러지면서 흙무더기에 휩쓸려 들어가 매장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는 제방이 터지지 않았고, 그 스님이 바로 진남사에서 온 오중 스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더해 그 제방을 진남제라고 했다.” 

<출처: 모정마을 이야기/2021/김창오/북랩출판사>.<계속>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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