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화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生​​​​​​전 1군단장(중장)전 병무청장​​경기도 안보자문위원
모종화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生​​​​​​
전1군단장(중장)
전 병무청장
​​경기도 안보자문위원

영화관람객 천3백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봄’ 영화를 작년 연말에 보았다. 옆에서 관람하시던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는 사뭇 노여움이 가득 찬 한숨을 내쉰다. 영화를 본 나의 머릿속에는 80년대 전후하여 지내온 초급장교 시절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하였다. 장교로서의 첫걸음은 격랑의 80년을 전후에 시작되었다.

특별한 외출, 특이한 경험

첫 번째 사연은 1979년 10월의 이야기다. 조용하던 태릉 육사 교정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국의 대통령이자, 000 생도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다는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루 지나니 영결식에 참가할 10여 명의 생도를 선발한다고 하였는데 그 중 내가 육사 대표로 선발되었다.

우리의 임무는 육·해·공 사관생도들과 함께 영구차를 서울역까지 호위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암 촌놈이 특별한 외출을 하여 처음으로 청와대를 구경하고 중앙청에서 열리는 영결식에도 참가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지금도 이따금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에 보관된 영구차를 보면서 45년 전 생각에 잠시 잠기기도 한다. 

두 번째 이야기이다. 79년 연말이 지나면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장교가 된다는 꿈을 정리하고 있을 시기였다. 12월 12일에 서울 한복판에서 ‘서울의 봄’ 영화처럼 당시 계엄사령관이 체포되고 신군부에 의한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였다는 당시에는 조마조마하고 놀라운 소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사는 과연 이번 졸업식에는 어떤 대통령이 참석해서 장교 임용장을 줄 것인가였다. 드디어 졸업식 날 임석상관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연세가 많으신 여사께서는 의자에 앉아서 임관하는 장교들을 격려해 주시는 색다른 광경이었다.

소위의 가슴에 박힌 격랑의 모습 

이제 가슴 아픈 세 번째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장교들은 임관하면 전문병과 별로 소정의 교육을 받는데 나는 광주 상무대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80년 4월부터 교육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 영암도 가고 우리 엄마 산소에도 자주 갈 수 있어서 무척 마음이 평온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사뭇 사치였나 보다. 5월의 중순 광주 시내에서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의 광경을 목전에서 똑똑히 보면서 상무대로 들어간 후 8월까지 격랑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고향 젊은이들의 절규와 외침, 민주화를 향한 희생의 현장, 사뭇 투쟁하다가 희생된 젊은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어느 정도 안정된 더운 여름날 국군 광주통합병원에 위문할 기회가 있었다. 병원 입구부터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눈방울은 잊을 수 없다. 

다시는 있어서도 안 될 혼란한 격동기에 출발한 나의 장교 생활은 많은 이야기 속에 35년을 근무하고 별 셋 장군으로 2015년에 영예롭게 군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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