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4]
■ 구림마을(33)

진남제 - ⑮양장 원머리 ~ ⑬동호리 구간에 쌓은 제방 1540년 월당 임구령이 진남제를 축조한 후에 모정, 양장, 동호 삼 리에 둘러싸인 십리평야가 생겨났고, 이것은 구림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지형변화를 초래했다.
진남제 - ⑮양장 원머리 ~ ⑬동호리 구간에 쌓은 제방 1540년 월당 임구령이 진남제를 축조한 후에 모정, 양장, 동호 삼 리에 둘러싸인 십리평야가 생겨났고, 이것은 구림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지형변화를 초래했다.

월당 임구령과 진남제 
조선 시대 1534년경 광주목사와 남원부사를 지낸 월당 임구령(1601~1562)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서호정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선산인 임구령은 난포박씨의 사위로 박빈의 증손인 박세간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로 인하여 처가 동네인 구림에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월당 임구령을 필두로 한 선산임씨의 구림 입촌은 구림마을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선산임씨는 구림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짓고, 십리평야가 잘 보이는 모정리 연못가에 쌍취정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함께 담론하고 풍류를 즐겼다. 회사정과 대동계가 마련되기 전의 구림은 요월당과 쌍취정이 중심이었다.
구림에 정착한 월당 임구령은 구림마을 주변 지세를 살피다가 양장리 원머리와 동호리 사이의 물목이 수백 간(수백 미터)밖에 안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기로 했다. 수천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수년간 제방을 쌓은 끝에 마침내 1540년 둑을 완성했다. 이 제방을 진남제라 불렀고 이 간척사업으로 말미암아 모정마을 앞에 ‘십리평야’라고 하는 너른 간척지가 생겼다. 

도선국사 탄생설화를 간직한 비죽
현재 모정(茅亭)마을이란 이름을 갖기 전의 지명은 비죽이었다. 이 비죽이라는 지명은 도선국사의 탄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바위 위에 버려진 아기를 비둘기들이 덮어 보호했다고 하는데 그 비둘기들이 날아간 곳이 바로 현재의 모정리 비죽골이다. 비죽은 구림 국사암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소다.

진남제 축조로 크게 변모한 구림마을
한편, 당시의 구림마을 주변 지형은 현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조선 시대 초까지만 해도 구림과 비죽·양장마을로 이어지는 구릉을 제외하고는 동쪽과 서쪽으로 바닷물이 출입했다. 즉, 서쪽으로는 서호강과 접하고 동북쪽으로는 덕진강과 만나서 너른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 반도 모양의 지형이었다. 도포와 덕진포로 연결되는 이 덕진강에서 비죽(모정리)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성재리를 거쳐 서호 상대포까지 배가 출입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인 1540년에 동호마을과 양장리 원머리를 잇는 진남제가 축조되어 십리평야가 생겼고, 뒤이어 일제 강점기 말 1943년에 서호면 성재리에서 군서면 양장마을 구성(九成)을 잇는 제방이 축조되어 ‘학파농장’이라고 하는 너른 간척지가 생겨났다. 게다가 1980년에 영산강 하구둑 공사가 완료되어 군서, 도포, 덕진, 시종, 서호, 학산, 삼호, 미암 8개 면에 걸친 간척지가 형성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덕분에 영암에서 가장 너른 들녘을 간직한 농촌 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구림 열두 동네 중 하나였던 모정(茅亭)
석천 임억령의 막내 동생인 나주목사 월당 임구령이 1540년에 동호리와 양장을 잇는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조성한 후 큰 언덕 아래 연못을 만들었다. 한쪽에는 정자를 지어 못에는 연꽃을 심고 고기를 키워서 운치를 아름답게 하고, 고기가 헤엄쳐 놀도록 꾸몄다. 정자는 처음에 ‘모정(茅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요임금의 모자불치라는 고사의 뜻을 취했던 것이며, 나중에 개축하여 쌍취정(1558년)이라고 이름하여 형제 동락의 뜻을 담았다. 모정 쌍취정은 그 당시 구림 열두 동네 중 하나였다.
* 모자불치(茅茨不侈) - 요임금이 왕이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띠로 엮은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던 연유에서 생겨난 고사성어.  

월당 임구령의 장남인 남호처사(구암공) 임호(1522~1592)는 쌍취정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쌍취정과 십리평야의 정취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쌍취정(雙醉亭)              
누른 비 십리평야에 질펀하다 기러기는 가을 소리를 알리는구나 옛사람 지난 일을 찾으니 자취 없고 둘이 취한 그때의 우정은 어디 있는고 

滿目黃雨十里平 만목황우십리평 賓鴻將子叫秋聲 빈홍장자규추성 仙人往事尋無跡 선인왕사심무적 雙醉當年友愛情 쌍취당년우애정 

창녕인 태호공 조행립(1580~1663)은 자신의 문집에 진남제에 대한 시를 한 수 남겼다. 

진남에 제방을 쌓다(鎭南築堤韻)
예전에 둑을 높게 쌓아 조수를 막아내니
옛날 진시황이 쌓은 만리성과 비슷하네
이제 다시 큰 공역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갈대밭에도 농사를 짓게 되었네

위의 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태호공이 살았던 시기에 진남제를 보수한 흔적이 엿보인다. 큰물이 지면 제방이 약해져서 여러 곳이 허물어지기 마련인데 태호공 조행립이 구림에 살던 1600년대에 대대적인 재공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남제 보수공사는 그 이후로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행해졌다. 모정, 동호, 양장 삼 리 주민들은 제방을 삼등분해서 관리했다. 홍수가 지면 꽹과리를 쳐서 사람들을 모아 울력을 했다고 한다.<계속>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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