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

낭산 김준연 기념관 - 영암 출신의 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낭산 김준연(1895~197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영암읍 교동리 생가에 세워져 있다.
낭산 김준연 기념관 - 영암 출신의 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낭산 김준연(1895~197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영암읍 교동리 생가에 세워져 있다.

일제는 김준연을 그의 대학 재학시절부터 요시찰대상 인물 갑호(甲號)로 지정하여 감시하다가, 제3차 공산당 사건으로 7년간 투옥(投獄)시켰고, 9년간 가택연금 시켰다. 최종에는 학살대상자로 지목, 그 집행 기일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에도 김준연은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고하 송진우에 이어 김준연에게 치안권 이양 수락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1945년 조국의 해방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그어 점령군 자격으로 한반도에 진주하여 남한은 미 군정이, 북한은 소련 군정이 시작되었다. 

김준연은 해방 그날,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요청을 거절하면서 공산주의와는 단절(斷切)하였다. 이유는 공산주의로는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민주당 조직, 반탁의 기수

이러한 해방정국에서 김준연은 김성수·송진우 등과 동아일보 그룹을 이루어 우익 민족진영의 구심점인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데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민당을 거점으로 반공 활동, 농지개혁 등 정책개발을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해외 환국 독립지사들의 국내정착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미 군정하에서는 민주의원 의원이 되어 민주적 교육제도와 노동문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됨에 따라 우리 민족 모두가 ‘제2의 식민시대’라며 결사반대하였다. 그러나 좌익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좌우로 분열되어 한반도는 혼돈과 무질서, 극단적인 테러로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좌익과는 합작이 불가함을 간파한 김준연은 좌우합작을 반대하면서 반공의 선봉에서 ‘생명을 담보’하는 반공 활동을 하였다. 

우리 민족 누가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이상일뿐 현실적으로는 좌익에 이용당할 뿐 오히려 정부수립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김준연은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백범 김구에 대하여는 물론,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도파 우사 김규식에 대하여도 공세(攻勢)적 태도였다. 좌우합작 세력을 일축하고 소위 남북협상파와 싸워 역사적인 5.10 선거에서 김준연은 그의 고향 영암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무투표로 당선되어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이 되었다.

그는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대통령 책임제 헌법을 탄생시킨 산모(産母) 역할을 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헌법 제1조는 내가 쓰겠다’던 자신의 말을 실현하였다. 

또한, 낭산 김준연은 신생국가의 국정의 굽이 굽이에서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시급한 국정 현안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리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것이요,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김준연은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면서도 신생국가 건설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면서 처벌의 대상을 완화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법이 표결과정에서 김준연 의원의 주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이 법은 한시법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와해 됨으로써 후환(後患)이 되었다. 

또 시급한 국정 현안은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문제를 처리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되면서 우리 농민들의 소원은 조금이라도 내 땅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것이 소박한 꿈이었다. 우리 정부는 1950년 3월 농지를 유상매입, 유상분배하는 방안을 근간으로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 개혁은 김준연이 1945년 9월 16일부터 3일간 한민당의 당내 농지개혁에 관한 토론에서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민당의 농지정책으로 채택되었고, 한민당의 농지정책이 정부 농지개혁의 근간이 되었다. 

이어서 김준연은 적산 처리문제를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하고서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이 패망하여 남기고 간 귀속재산(敵産)을 처리하는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가 수립된 이후 ‘한일 간에 회담을 통하여 처리한다’는 내부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김준연은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이를 번복하는 논거를 국회의장에게 제시하고, 국민의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김준연이 제시한 ‘미 군정이 몰수한 적산을 우리 정부가 인수하고 이를 일본이 확인’하는 절차에 의하여 적산을 처리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김준연은 반공 노선에서는 이승만과 궤를 같이하였으나 헌법을 유린(蹂躪)하는 정치 노선에는 단연코 반대하였다. 

통일당 창당과 싸늘한 국민의 시선

그는 이승만의 폭력과 부정에 의한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에 의한 헌법개정을 겪으면서 재야인사 등과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춘 야당의 본류인 민주국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준연에게 몇 차례의 정치적 시련이 있었다.

뉴델리 밀회사건에 대한 정가의 비판적 시각이며, 민주당이 신·구파의 갈등으로 빚어진 당권 쟁탈과정에서 김준연 자신이 제명처분을 당하자 민주당을 이탈, 통일당을 창당하여 자신의 부통령선거 출마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이는 향후 그의 정치행로에 암운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김준연의 통일론은 국회에서 많은 토론을 거쳐 채택됨으로써 그의 이론의 탁월함을 입증하였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휘했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급서하고, 부통령후보였던 장면이 승기를 잡았으나 자유당 이기붕의 계략으로 대구 개표가 3일 동안 지연되자 낭산 김준연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독대, 대구 개표과정을 개진(開陳)함으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국가적 불상사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징집 대상자로 전라남도에서 장정 24만 명이 침구와 식기만을 등에 메고 부산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법무부 장관 김준연이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귀향하게 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걸어가는 장정만도 50만 명이었고, 9만 명의 동사·아사자가 발생하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정희 군부독재와의 투쟁

김준연은 5.16 군사 독재 정권과 정치생명을 걸고 투쟁하였다. 
그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남로당 군사총책전력에 대한 사상을 공박하며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정치 상황은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협정 회담을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격화일로(激化一路)에 있었다. 이때 김준연은 군사정권이 일본으로부터 ‘대일청구권자금 1억 3천만 불 사전수수설’을 폭로함으로써 일파만파로 국가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의혹은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와 관련된 미국 CIA 문건이 2000년대 초에 해제되면서, 한일협정이 추진 중일 때에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공화당에 6.600만 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김준연 의원의 폭탄 발언을 방증(傍證)하였다. 
군사정권이 자기들을 공격하는 선봉에 있는 정치인 김준연을 보고만 있겠는가! 

군사정권은 1967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준연을 탄압, 그는 양대 선거에서 실패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낭산 김준연은 정당의 편력(遍歷)이 많다는 일부 인사들의 지적이 있으나 이는 표피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낭산은 초지일관하여 야당을 지켜왔다.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