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

낭산의 생전 모습
영암 출신의 항일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낭산
김준연(1895~1971) 선생의 생전 모습. 

(2) 낭산 김준연과 그의 시대

낭산이 걸어온 길
우리가 낭산 김준연 선생을 추모하는 것은 그가 동경제국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학벌과 법무부 장관에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훌륭한 학벌과 경력 때문만이 아니다. 선생은 10여 년간의 외국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민족의식을 정립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의 가시밭길을 자초하였다. 해방정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 나라에 구축하기 위해 반공 투쟁을 하였으며, 우리의 신생 정부가 수립되면서는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헌신하였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군부와는 자신의 운명을 건 반독재 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선생은 정계를 떠나 야인이 되었다. 선생은 동심처럼 솔직하고 담백하였으며 청렴하여 작고할 때까지 집 한 채 없이 둘째 딸 집에서 살다가 타계하였다. 

민족의 동량이 되어
낭산 김준연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헌법 제1조는 내가 쓰겠다”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은 일본 통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언젠가 해방이 된다는 확신과 희망이 담긴 말로, 그가 우리 민족에게 보내는 강한 메시지였다. 말과 문화가 있는 민족, 얼이 살아있는 민족은 외침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받을지라도 언젠가는 이를 타개하고 일어설 수 있다는 강한 화두이다. 김준연은 자신의 이 말을 실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문에 대한 도전의식이 강했다.
그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한반도의 서남단 전라남도 영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수재들이 모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과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여 세계적 안목과 자질을 갖춘 민족지성(民族知性)이요, 민족동량(民族棟樑)으로 우리 민족 특히 젊은이들에게 한 가닥 빛이요 희망이었다.

 낭산 김준연, 그의 화려한 학벌로, 일본의 통치방침에 따르기만 하면 일본이 우리 민족 회유 차원에서라도 동경제국대학의 교수직이나 일본 정부의 고위직을 제공하겠다고 유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생 때부터 요시찰 감시대상 갑호(甲號)였다. 그는 일제의 수탈과 탄압에 의한 민족의 참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영달이 아닌 조국의 광복을 찾고자 험난한 가시밭길을 자초하였다. 

그는 민족계몽 운동에, 항일독립운동에, 민족문화보존 운동에 혼신을 다 바쳤다. 동경제국대학 시절에는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 간부직을 맡아 2.8 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이 한창일 때 일본 학계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여명회(黎明會)의 초청 강연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 조선인과 일본인은 동화할 수 없다’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또, 학지광 (學之光) 등의 편집인이 되어 시대조류를 알리는 등 민족계몽 운동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경제대 졸업반 때는 <학우회 고국순회강연단>의 단장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하여 우리 민족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학문에 대한 도전의식이 강한 김준연은 시야를 세계의 심장 유럽으로 돌려 독일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였다. 경제학과 법률학은 물론, 공산주의 이론도 탐구(探究)하여 그에게 ‘움직이는 사회주의 도서관’이란 별칭이 붙었다. 이는 항일독립운동을 하는데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베를린에서는 주로 고려유덕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김준연은 이때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은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일본인을 죽인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준연은 그해 10월 ‘재독한인대회’에서 이극로, 고일청과 대표가 되어 영문과 독문으로 <한국에서 일본의 잔인한 통치>라는 선전문을 작성하여 독일과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는 등 일본의 폭압 통치의 실상을 폭로· 규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패전국으로 물가폭등과 정치와 경제,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다. 당시 튀루케이도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어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전비배상(戰費賠償) 등의 문제로 국민이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때 카밀(Kamil Attaturk) 이 등장, 국민을 통합하여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혁명을 주도하여 튀루케이를 재건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때 김준연은 독일은 물론 튀루케이와 그리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巡訪), <민족의식>을 정립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이를 국내 언론에 수시로 기고하여 국민에게 세계조류와 시대정신을 알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김준연에게 세계적 안목과 자질을 갖춘 민족동량(民族棟樑)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미지의 세계, 소련취재의 대역사 수행
10여 년간의 해외 유학을 마친 김준연은 1924년 말 귀국길에 올라 런던을 경유하여 1925년 2월 초에 귀국하였다. 그는 여장을 풀기도 전에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우리 국민에게는 미지의 세계 소련으로 가서 그곳을 취재하였다.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을 이룬 소련의 전당대회 참관을 비롯하여 정치와 경제, 사회와 교육, 도시와 농촌 등을 45일 동안 심층 취재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수행하였다. 
김준연에게 소련취재 활동은 “공산주의가 인류의 낙원”이라는 구호(口號)가 현실과 부합하는 지를 확인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그가 민족주의자가 되는데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김준연은 언론에 투신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안재홍·조병옥 등과 민족유일당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여 체계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ML당 사건으로 7년간 감옥 생활
제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책임비서가 되어서는 노동자·농민의 전국적 조직화와 국제공산당과 연계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는 혁명가로서 부단히 활동하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7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김준연은 감옥에서 일제의 고문 등 극한 상황에서도 ‘나에게는 소명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독서에 전념하여 인생의 깊이와 폭을 넓히면서 항일운동을 하는데 재충전의 기회로 여기고 고통을 이겨냈다. 이때 무엇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아들 희종이 병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김준연은 1928년 2월 체포되기 전에 흥업구락부에 가담하고, 조선사정 연구회(朝鮮事情 硏究會)를 조직하는가 하면, 자치(自治)를 주장하는 연정회(硏政會)의 결성을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독일 유학생들에게 벨기에의 브르셀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도록 만주까지 가서 여비를 송금하였다. 

1934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여 다시 동아일보에 돌아간 김준연은 역사현장을 답사하는 등 민족문화보존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하여 고하 송진우와 함께 동아일보에서 퇴직당하고, 경기도 연천의 해동농장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9년 동안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창씨 개명을 거부했고, 젊은이들에게 군입대 권유연설을 하도록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김준연은 제2차대전의 종말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 경찰서에,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구인(拘引)되어 곤욕을 당하였다.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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