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

 

일본군은 영암 의병들이 거점으로 하고 있는 국사봉 해발 613m 고지를 등고선을 이용한 전투약도를 그려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토벌 작전을 벌였다. 사진은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구한말 의병들을 촬영한 것이다.
일본군은 영암 의병들이 거점으로 하고 있는 국사봉 해발 613m 고지를 등고선을 이용한 전투약도를 그려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토벌 작전을 벌였다. 사진은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구한말 의병들을 촬영한 것이다.

<‘박평남 의병부대는 실존했는가?’에 이어서>

박평남은 무기가 빈약하고 훈련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예교에게 훈련을 책임지게 하고 박평남 자신은 무기를 매입하기 위하여 나주 박민수 대장 휘하 의병감으로 있으면서 헌병 보조원 김현규· 최경심과 일인 다나가와 밀통하여 왜총 100자루를 매입, 영암에 보내 왔다.(영산포 헌병소에서 밀매) 

이후 이를 근거로 여러 간행물에서 인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1991년 재경영암향우회에서 창간호로 발간한 <靈巖>誌에 신희범(국사편찬위원회 항일투쟁사 의병 편 전문위원)이 <영암의 항일투쟁사>라는 제목으로 기고하였다. 

2. 1996년 11월 29일 호남의병전쟁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주관: 준비위원회와 전남사학회, 주최:호남 의병추모사업회) 주제인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에서 이태룡(호남의병 추모사업회 연구이사)이 영암 국사봉과 호남의병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면서 <박평남 의병>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태룡은 2006년에 출간한 그의 저술에서 박평남 의병 부분을 다루지 않았다.

3. 1998년 10월 30일 영암군에서 출간한 <영암군지>에서 집필위원 신희범이 의병부분을 집필하였다.

4. 2019년 영암문화원에서 출간한 <영암의병사연구>에서 필자와 공동집필자인 박해현 교수가 박평남 의병부대를 다루었다. 

그러나 필자가 박평남 의병부대의 실재(實在)에 대하여 회의적인 것은, 박평남은 영암 덕진면 백계리가 아닌 나주군 전왕면 석길촌이 주소지(機密統發 제1179호)인데 어떻게 영암 덕진면 백계리 인사가 되었으며, 그가 영암 지역사회에서 어떤 기반을 가진 인물이기에 1908년 정월에 격문을 발하고 1개월의 단기간인 2월에 600여 명의 젊은 청년들이 의병대열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박평남이 영산포 헌병소를 통해서 무기를 구입하였다고 하였는데 일본 헌병대가 그렇게 부패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박평남 부대가 결성될 시기는 심남일 의병부대가 영암 금정면 일대로 의진을 옮길 기간으로 두 의병부대가 겹치며, 박평남 의병부대의 지휘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지휘부와 겹치면서 이후 박평남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이태룡은 영암 국사봉과 호남의병(호남의병 100주년 학술회의 발표주제)에서는 박평남 의병부대를 다루었으나 이후 그의 저 <한국 근대사와 의병투쟁> 총 4권에는 박평남 의병부대를 다루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홍영기 교수가 2004년에 출간한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에서도 박평남 의병부대를 다루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박평남은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고 하였으나,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 체포하여 대구감옥에서 처형하기 전에 촬영했던 16인의 호남 의병장(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의 명단에 박평남의 이름은 없다.

결론적으로, 1908년 정월에서 2월간에 박평남 의병부대는 실재하지 않았음에도 이 부대가 실재한 것처럼 공명심(功名心)에서 심남일 의병부대를 모방하여 1980년대 말에 신희범 집필위원이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박평남 의병부대가 의병 편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통감부 경무국에서 1909년에 작성한 <폭도에 관한 편책>으로, 전남경비발 제 1470호의 ‘폭도세력 비교표’에서 1909년 7월과 전월의 신규로 모집한 부하원 숫자가 40명이며 습래도수(襲來度數)는 각각 4회와 3회로 기록되었다.(한국독립운동사 의병편 자료 15, 141쪽)  
收 제4189의1에 의한 박평남 관련 기록을 보면, 수괴 불명의 비도(匪徒) 약 20명이 본월 17일 무안군 입화면 광대동에 래습한 것을 알고 오전 10시 촌민(村民)의 보고를 받고 무안읍 주재 일인 순사 1명과 한인 순사는 즉시 토벌로 급행하여 ---중략---  적은 수괴 박평남 및 라(羅)모의 부하인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라. 일본 보병 제14연대의 한국 파견과 의병탄압
일본은 한국주차군수비대를 1904년 3월 설립하였다. 후비보병 제24연대 병력 4천272명을 한국에 파병, 서울과 부산, 원산에 집중배치 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이 종료된 후인 1905년 10월 보병 제13사단과 제15사단 병력 1만8천398명을 한국에 파견하였다가 제15사단은 1907년 3월에 철수시켰다. 이후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보병 제14연대를 포함한 1개 여단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보병 제14연대는 일본 구주지역의 소창(小倉)에 본부를 둔 보병 제12사단 소속부대였다.

제14연대 병력은 7월 25일 오후 2시 55분에 소창(小倉)발 기차에 탑승, 문사역에 도착하여 오후 4시 10분 모지항에서 화태환(樺太丸)에 승선하여 오후 6시 부산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은 다음날인 7월 26일 아침 부산항에 상륙하여 각 부대는 이미 하달된 수비지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목포수비대와 광주수비대, 군산수비대는 부산에서 배편으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철도편으로 현지에 급파되어 수비를 담당하였다. 광주와 목포수비대는 제2대대 제8중대였다.(진중일지Ⅰ, 7-9쪽 참조)

보병 제14연대가 전적으로 우리나라 후기의병 즉 호남의병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우리 의병을 토끼몰이하듯 교반작전(攪拌作戰)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 작전을 하기 이전에 영암의병이 거점으로 하고있는 국사봉 해발 613m 고지를 등고선을 이용한 전투약도를 그려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토벌 작전을 하였다.(1909년 2월 26일 덕룡산 전투약도)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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