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

전북 무주에 세워진 강무경 의병장 동상과 강무경·양방매 사적비. 무주군 나제통문 인근에는 ‘항일투사 순국 의병장 강무경·홍일점 의병 양방매 부부사적비’가 건립돼 있다.
전북 무주에 세워진 강무경 의병장 동상과 강무경·양방매 사적비. 무주군 나제통문 인근에는 ‘항일투사 순국 의병장 강무경·홍일점 의병 양방매 부부사적비’가 건립돼 있다.

전편 <연합작전을 펴다>에 이어서
여러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와 모였기로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악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 낼 수가 없은 즉, 여러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숨고 도망하여 각자도생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가 나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겠는가, 어찌 이웃 나라에 알릴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국 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천기를 바라보게 한 바, 5색의 무지개가 서쪽을 꿰뚫었다.
모사 권택이 점을 처 보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 들이 어떻게 변했느냐‘ 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1부대는 동족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 나주 남평 3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덕룡산 상봉에 매복하고, 1부대는 병암치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교전 한지 8시경에 능주의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들어와 충돌하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에 광주 나주 남평의 적 60여 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 싸움에서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그 중 들어난 이는 박여홍 박태환 박기춘으로 여홍 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 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심남일 실기>

금정 고인동서 의병 해산
심남일 의병장은 순종 황제의 의병 해산 조칙에 따라, 또한 의병들의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금정면 고인동에서 1909년 7월 21일(음) 의병을 해산하고 강무경 양방매(강무경의 처) 등 5명이 능주 풍치(風峙) 석굴안에서 부상당한 몸을 치료하던 중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장군은 체포되어 광주감옥에서 1909년 12월 15일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1910년 7월 23일 대구감옥에서 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영암인
심남일 의병부대의 지휘부 중 영암인 들로는 박도집(종남면), 김치홍(순국, 종남면), 김성재(후군장), 공진숙(통장), 양방매(금정, 강무경의 처), 정관오(신북), 이복근(미암면), 유시연(신북), 김선중(순국, 금정) 등을 들 수 있다.
남편과 석별한 양방매 의병은 친가에서 일생을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28일 향년 96세로 한 많은 생을 마치고 금정면 남송리 당치에 묻혔다가 1996년 10월 9일 국립묘소에 합장되셨다.(강씨 문중에서 건립한 순국의병장 강무경부부사적비문 중에서)
양방매 지사는 우리 정부로부터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2005년 독립유공훈장(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이에 앞서 윤희순(1860-1935년) 여성 의병이 1990년에 독립유공훈장(애족장)을 받았다.
양방매와 강무경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건립된 비문에는 후손으로, 아들은 기록에 없으나 손자가 6명으로 대성 상원 경원 진원 일원 배원 6명의 이름을 필자가 확인하였다.

나. 국사봉 호남의병기념사업 좌절과 필자의 제안 
1996년 발족한 호남의병추모사업회는 이사장에 김명출, 회장에 최삼우, 연구 이사에 이태룡으로 조직을 갖추고, 이들은 회원들과 한말 호남의병 유적지를 답사하고 의병의 삶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성지로 삼은 국사봉(일명 덕룡산) 기슭에 의병총을 봉안한 후 제당, 기념관, 의병탑을 세우려는 사업을 추진, 국사봉 기슭에 제당(祭堂)을 건립 중이었으며, 의병총(疑兵塚)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이 사업을 추진하던 인사들이 전부 호남지역이 아닌 외지인들로 이 사업을 추진하는데 소요자금 부족과 최삼우 회장의 발병(고혈압과 화병)으로 더 이상 사업을 추진할 수 없어 중단하였다. 게다가 이 사업 추진과 관련하여 자금 수수사건이 발생하여 추진자가 고발당하는 등 형사사건으로 비화하였다. 
이 당시 이태룡(경남 양산 물금 출신,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 공모교장) 호남의병추모사업회 연구 이사는 ‘국사봉에서 바라본 호남의병’에서 아래와 같이 논설(論說)하였다.
호남 의병투쟁은 주로 백두대간과 호남 정맥을 따라 펼쳐졌으니 그 시작이 덕유산· 지리산 산록이요, 마지막이 영암 국사봉(일명 德龍山)을 거쳐 동으로는 백운산이고, 서남으로는 달마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호남 토왜지를 답사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즉 지리산 산록에는 고광순· 김동신, 어등산에는 김준, 석문산에는 전해산, 수록산에는 기삼연, 추월산에는 양진여, 동소산에는 안규홍, 국사봉에는 심남일 의병장의 추모장이 있었더라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학습장이 부족하여 관광지로 돌면서 수악(修惡) 여행은 다니지 않아도 될텐되 하는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물질문명적 차원의 관광여행보다는 정신문화를 일깨워주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되어야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권고는 허공에 
필자는 4-5년 전 영암군청 관계자에게 국사봉을 중심으로 금정면 일대에서 전개되었던 한말 호남의병의 토왜전(討倭戰)을 설명하고 이에 관한 자료(일본군 보병 제14연대의 진중일지)를 건네면서 연구를 거쳐 기념사업을 추진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관계자료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전라남도 차원에서 호남의병 추모사업을 추진하겠다면서 각 군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면 내용을 검토하여 선정된 시군에 사업비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암군은 이에 신청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나주시가 선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는다. 

다. 박평남 의병부대는 실존했는가?
박평남을 의병 총대장으로 한 항일 영암의병부대가 간행물에 처음 수록된 것은 1989년에 출간된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상권, 이하 총사라함’ 383쪽에서다. 
내용을 간략하면, 무신(서기 1908년) 정월 박평남(덕진면 백계리 출신)은 격문을 사방으로 냈던바 피끓는 청년들이 쇄도하여 2월에는 6백 명이 넘는 막강한 의병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박평남을 총대장으로, 좌익장 신예교·하영선, 선봉장 노병우·신모, 중군장 김치홍, 중군장 김은식·최재현, 후군장 김선중---이하생략---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으며 총 96명의 의병명단을 수록하였다.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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