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종 화    

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生
​​​​​​ 전 1군단장(중장)
 전 병무청장

고향 떠나 객지 생활한 지 50여 년이 지난 갑진년 새해 눈 내리는 날 미끄러운 길 걸으니 태어났던 영암 고향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지나온 세월 속에 하얀 이슬이 대부분 차지한 머릿수를 보고 나도 6학년 졸업반이 되어 가는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뒤늦게 찾아온 영암신문의 낭주골 코너 속에 그동안 묻어온 고향에 향수를 담을 수 있어 나에게는 갑진년 새해에 제일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필자에게는 고향 영암의 추억 속에 말 못하고 살아온 얽힌 사연들이 참 많다. 아마 살아온 인생의 길이 다양하고 특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군인 장군으로, 대학교수로, 병무청장으로 인생의 다섯 번째 계단에 앉아 이제 천천히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자전거 타던 시골 중학생이 품었던 꿈 
나는 학산 독천에서도 멀고도 깊은 산골짜기인 은곡리 석포에서 태어나 몇 명 안되는 중학생이 되어 운 좋게 낭주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학교 다니는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하고 버스도 드물어 2여 시간을 자주 고장나는 중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매일 다녔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첫닭 우는 시간에 맞춰 어두운 새벽에 하얀 체육복을 입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길이 험악해서 절반은 끌고, 절반은 타고 돌부리에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2시간 정도 걸려 교실에 들어서면 나는 몇 안되는 단골 지각생 중 한 명이다.
하얀 체육복은 자전거 뒷바퀴의 흙으로 뒤범벅되었고 엄마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은 자전거 위에서 잘 만들어진 비빔밥이 되어 온갖 젓갈 냄새로 교실에 잔잔한 내음을 제공하면 반 친구들이 코를 싱쿵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예민한 나이에 무척 창피했다.

집에 가는 늦은 시간이다. 학교 앞에서 10원짜리 호떡 냄새 뿜기며 한입에 넣고 맛있게 사먹는 친구들을 애써 못본 채 하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 어두워진 시간에 집 중간쯤 오게 된다. 저 멀리서 키는 작고 몸배 바지 입고 기다리는 여인을 본다. 우리 엄마다. 누구보다도 어려운 가정생활이지만 중학교 보낸 아들이 그토록 대견스러워 언제나 무섭고 힘들지만 중간쯤 마중 오셔서 아들을 기다리신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엄마는 뒤에서 밀고 산을 넘어 집에 오면 깜깜한 저녁이다. 모진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는 배운 것은 없지만 내 아들만큼은 가르쳐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바램이 있었나 보다. 늦은 저녁에 어두운 산길을 걸으면서 아들과 엄마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까지 포함하여 우리 아들은 ‘법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의사가 좋지. 대학 선생도 좋다고 하더라’ 등 동네 아줌마들로부터 들은 얘기 중 좋은 직업은 무조건 아들이 꼭 되리라고 믿으시는 우리 어머니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가고픈 광주로는 못가고 용당 선착장에서 철선을 타고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목포로 유학을 가서 목포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시골놈이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우리 엄마는 세상을 다 얻을 기분이신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3년 동안 유달산 밑 제일 좋은 집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일명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나는 그때부터 인생이 살아가는 두 부류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시간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이따금 아들 찾아온 우리 엄마는 왜 그리 초라하고 아들에게 잘해달라고 주인에게 자신 없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가슴을 멍하게 만든 주위환경을 원망하며 나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시골 놈이 장군이 된 계기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나의 삶을 바꾸어버린 운명의 한 분을 만났다. 해병대 대위로 전역한 물리 선생님이었다. 무조건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보라는 반 강요적 선택이었다. 단계 단계를 넘어 육군사관생도가 되었지만, 불쌍한 우리 엄마는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 생도가 된 1년 후 그만 일찍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법관, 의사, 교수가 아닌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을 생도 2학년 따뜻한 봄, 태능 교정에서 마지막 면회 후 헤어질 때 슬피 우시던 우리 엄마는 남들처럼 오래 살지도 못하고 일찍이 가셨다. 어머니를 영암 석포부락 양지쪽에 모신 후 나는 마음속에 강한 응어리와 굳은 결심으로 장교가 되어 한 번도 뒤처짐 없이 별 셋 장군까지 달았다. 소장으로 진급하여 고향에서 사단장을 할 때 어머니 묘소를 찾아 경례하며 술 한잔 올려 드렸다. 그리하여 자전거 타고 키워온 나와 엄마의 꿈은 방향은 바뀌었지만 비슷하게 이루어진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고향의 포근한 양지 기슭에 계시는 우리 엄마는 지금도 자전거 밀어주며 도란도란 아들과 꿈을 얘기했던 시간이 가장 행복하셨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독천까지 길이 좋아져 차로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영산강 하굿둑이 생겨 만들어진 너른 벌판의 고향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싶다. 군에서 진급할 때마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승승장구하라고 격려해주시던 고향 선후배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만간 월출산의 정상에서 고향의 벌판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여태까지 장군이 되어 받은 별 셋의 영광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영암 고향 분들에게 작은 초승달이 되어 함께 하고 싶다. 나에게 힘이 남아 있을 때 서둘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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