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인민군유격대 전남 제3지구 유치지구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금정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유격대 전남 제3지구 유치지구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금정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3. 영암 근·현대사의 오류사례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하면서,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E·H Carr가 정의하고 부연한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여기에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그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암에 내려오는 잘못된 오류의 역사를 밝혀내고 이를 바로잡는 것은 현대 영암인의 책무라 하겠다. 
필자는 영암의 근현대사 중 오류 부분이 전승되고 있는 두 사례를 적시(摘示)하고자 한다. 

(1) 구한말 영암 의병의 구국 전쟁
 구한말 영암 의병이란 대한제국기(1897-1910)에 국권 침탈을 해온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국가의 부름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영암지역을 중심으로 토왜전에 참여한 지사이다. 영암 의병은 구한말 후기 호남 의병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항일 투쟁을 하였다.
호남 의병은 전기의병과 중기의병이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으로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후기의병(1907-1910)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남 지역에서는 김동신, 호남 창의회명소, 기삼연, 김준, 고광순, 김용구, 이석용,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문태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활동지역을 보면, 기삼연은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며, 김준은 나주, 함평, 광주 일대이며, 김용구는 기삼연 부대와 연락하며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등지며, 이석용은 전라북도 동북부에서 크게 활약했다. 전해산은 영광 불갑산, 담양 대치면, 함평 월야면, 나주 고막원, 함평 해보면, 영광 오동리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안규홍은 보성출신으로 파청, 누봉산, 진산, 원봉, 광양, 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파청과 원봉 전투는 유명하다.(한국독립운동사 사전 총론편·상184-5쪽)
후기 호남의병의 교전 상황을 보면 1908년 전국교전횟수 1,976회 중 호남이 493회로 24.9%이며, 1909년에는 전국 총 1,783회 중 호남이 820회로 45.9%를 차지하고 있다.(한국독립운동사 사전 의병전쟁Ⅱ,181쪽) 

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영암 활동
심남일(1871-1910)은 1907년 12월 5일 함평에서 기병하여 1909년 해산할 때까지 강진, 장흥, 영암, 능주, 해남 일대에서 교전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 데 기여하고, 의병부대 간 연합전선의 형성을 주도한 중요부대였다. 심남일 부대가 호남 의병 중에서도 특기할 점은 대포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영암의병은 1908년 2월 심남일 의병부대가 장기전을 목표로 영암의 금정면 산악지대로 유진(留陣)을 옮기면서 이전에 활동하던 박도집 부대 등 소규모 의진이 심남일 부대에 합류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거점 국사봉
의병부대는 일정한 장소를 오랫동안 거점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산세가 깊고 높아 전략상 유리한 지점을 자주 거점으로 하였다. 국사봉은 산세가 깊고 해발(613m)이 높으며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군사적 요충지대이다. 광주 수비군 사령관 요시다(吉田) 소령 보고(11월 24일 광주에서)
11월 20일 영암 수비대장 나까하라(中原) 대위의 보고에 의하면 그 무렵 그곳에서 배회한 적단(賊團)은 심남일이 인솔하는 약 50명 정도이고, 전수비 대장 구시노모도((楠本) 기병 대위의 말에 의하면 심남일은 장성 방면으로 가버렸고, 그 부장 강무경이 우두머리가 되어 국사봉(장흥 서북방 약 5리) 부근을 근거 삼아 각 방면에 출몰하고 있다 함. (진중일지 10권 18쪽)

금정 사촌의 접전
1908년 7월 그믐날, 이른 아침에 모사장 권택과 더불어 적을 토벌할 계획을 하고 점을 처보니 점괘에 앉아서 큰 도(道)를 발하며 여섯 나라를 통솔한다 하였다. 권택은 “좌우로 돌담이있는 그사이에 복병하면 오늘 하오 2시경에 적의 목을 베어올 수 있다” 말하므로 그 말에 의하여 복병하고 기다렸다. 오정이 되자 과연 영산포로부터 왜장 고도히라(琴平山)가 기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쏜살같이 달려오므로 우리 후군은 포를 터뜨리며 달아나 산속으로 들어가니, 적이 포소리를 듣고 우리를 추격해왔다. 이에 복병이 일제히 포를 터뜨려 금평산과 그 기병 10명을 쏘아 죽이고 행장과 무기를 탈취했다. 그래서 그 행장을 뒤져본즉, 6국을 수호했으며 여러 번 싸움에 승전했다는 초지가 들어 있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시작하여 모래를 날리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천지가 캄캄했다. 오후 2시부터 싸움이 벌어져 6시에 끝나므로 군사를 수습하여 당산촌(금정면 남송마을에서 동쪽 쌍계사 터 하류에 위치한 마을로 일명 인곡이라 하였다 함)에 와 유진하였다.(심남일 실기)
※사촌(沙村)은 금정면 청룡리의 주 마을 이자 내산 3개 마을의 중심으로 동산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심남일 의병장, 금정 분토동에 눕다
1908년 10월 27일, 나는 선봉 강무경과 함께 병이 나서 영암 분토동에 누워 있으면서 중군 박사화, 후군 노병우·최우평, 통장 김도숙, 기군장 장문연, 호군장 정관오를 불러 들여 말했다. 나는 병이 들어 출전을 못하겠기에 내외 모든 사무를 제군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제군은 특별히 백성을 무마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부디 제물을 빼앗지 말고, 겁탈하자 말고, 죄없는 사람을 두들기지 말라. 그리고 또 경솔히 발동하지 말며,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집안사람 보는 듯하여 반갑게 서로 대하며 아예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중략)여러 장수는 고개를 숙이며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고 이날 밤에 노안리(老安里)로 출진하였다. 그래서 이튿날 능주읍에 있는 헌병을 무찌를 계획으로 돌정리에서 군사를 먹였다.(심남일 실기) 
※분토동은 금정면 청룡리의 1개 마을로 구한말에는 의병의 거점이었으며, 6.25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의 거점지가 되어 마을이 전소되었다. 노안리는 금정면 안노리(安老里)의 오기(誤記)임. 

연합작전을 펴다
기유(己酉)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는 박병주 박채홍과 함께 나주 월교리에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 세 사람의 진이 남평 운삼동에서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으로 들어갔다” 보고함으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에 머물고, 박봉주 박채홍은 철천에 진을 치고, 박민홍은 선동에 주둔하여 4진이 서로 4,5 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하여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을 건 결과 겨우 5명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남은 적은 영산포로 달아났다.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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