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 전 목포시 교육장
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내 어린 시절 아시내 뒷동산에서 바라보는 은적산 노을은 곱기가 그만이었다. 은적산의 곱디고운 노을은 학파 저수지에 반사되어 붉게 타올랐고 가끔씩은 저승으로 가는 길 같아 무서웠다. 해가 짧은 겨울 상은적봉에 노을이 생길 즈음 학파 저수지 은적산 쪽에서, 종일 땔감을 해 머리에 이고 줄지어 오는 그 많은 아낙네들의 모습은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몸뎅이보다도 더 커다란 땔감둥치를 머리에 이고 걷는지 뛰는지 춤추듯 걸어오는 한줄기 여인들의 모습은 은적산 노을을 배경으로 차라리 눈물이었다. 

은적산은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와 학산면 신덕리 경계에 놓인 산이다. 상은적봉이 395m이고 하은적봉이 305m다. 은적산 정상에 올라 보면 북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둘러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치솟는 산군(山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남쪽으로는 영산호와 간척지가 조망된다. 강과 호수, 바다와 간척지, 무리를 이루는 산을 구경할 수 있는 산은 은적산 뿐이리라. 그래 은적산은 스스로 빼어나기보다는 빼어난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맛이 일품인 산이다.

조선시대 사료로는 은적산의 한자 표기는 ‘銀積山’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隱跡山’으로 바뀌었다. 왜 한자표기가 바뀌었을까. 혹여 금은보화가 묻힌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였을까. 은적산 마을 장천리 장동에는 지금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당진 사람 김화곤이 노다지 꿈을 꾸고 1940년대 초반 무렵 장동 물방아골에 흘러들었다. 은적산 옥룡골 중턱에서 금광을 찾아내 금을 골라내려 물방아도 세워, 반짝이는 광석을 파 날라다가 물방아를 돌렸으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전 재산을 털어가며 노다지 꿈을 버리지 못하던 화곤이는 결국은 빈털터리 되어 은적산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해 빈손 된 사람을 위로 반 놀림 반으로 ‘화곤이 신세’라는 말을 쓰게 됐다.
내 유년 시절 신혼이었던 엄길 외갓집 일꾼은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밥을 먹으면 언제나 은적산 구적골 해미재를 넘어 신덕리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는 아내를 찾아갔고 신 새벽이면 외갓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열었다. 은적산 열두 골짜기 구불구불 어둠에 싸인 산길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적골의 열두 귀신도 짠한 아내를 찾아가는 젊은 사내를 범접하지는 못했다. 분명 당시 은적산 열두 골짜기에는 지혜 많은 늙은 귀신만 살았으리라.

은적산 시인 전석홍은 은적산 마을 장동에서 태어나 물방아골에서 고시 공부를 하여 합격해 전남지사도 하고 국가보훈처장도 했다. 전 시인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은적산 연작시 17편을 썼다. 시인은 어느 여름날 목포항에서 감치 나루 가는 배를 놓쳐 용당 가는 배를 타게 됐고 용당에서 사십 리 길을 걸어 신덕 외가에 도착해 저녁을 얻어먹게 된다. 그리고 달도 없는 먹밤에 구적골을 넘어오는데 ‘내가 앞서고 동생은 가운데/아버지는 맨 뒤에서 호위를 했네./재를 넘어 구적골 어둠 속/구불구불 산길이/너무나 깊은 고요에 잠겨/오히려 두려움이 나를 휘감았네./문득 깜박이는 마을 등불이/눈망울에 비칠 때/안도의 반가움이 온몸을 녹여주었네./ 라고 쓰고 있다. 또한 은적산 자락에 몸을 의탁해 삶을 영위하는 가족을 위해 은적산은 ‘요리조리 산허리를 굽혀 좁다란 발길을 내어주었네’라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찌 은적산이 전 시인에게만 은혜를 베풀었겠는가. 은적산 민초 모두는 젖가슴을 내어주는 어머니 품속 같은 은적산에서 지랄 같은 세월을 견뎌냈다. 그 옛날 은적산이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산이었다면, 내가 기억하는 은적산은 억척같이 살아내는 민초들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을 감춰 주는 산이었다. 

산악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은적산은 전국 300대 명산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은적산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은적산 노을이 너무나 붉었기에, 오지랖이 너무나 넓었기에, 그리고 숨어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서러웠기에 나는 은적산 엘레지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열두 폭 스란치마를 입은 은적산은 영원토록 은적산 민초들을 보듬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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