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 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눈발이 흩날리고 한해가 지나니 마음이 쓸쓸하다. 지난 달 초순에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전남합동추모제를 영암군유족회에서 주최했다. 마음을 모아 정성껏 제찬을 마련하여 500여 명의 유족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그 후로 영암군유족회의 합동 추모제도 모셨다. 억울하게 먼저 이승을 떠난 1천300여 명의 영령들을 위무하고 천상에서 영면하시기를 기원했다.

사람은 태어나면 한 번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겠지만 전쟁으로 인해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공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이해하고 또 이해하며 생각해봐도 피해 가족들은 너무나 원망스럽다. 억울하다. 73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가해자는 뚜렷이 없다. 가해에 대한 책임이나 사과 한마디가 없으니…,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에 시달려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해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고학(苦學)으로 겨우겨우 최소한의 학력만을 가진 사회생활은 쓸쓸함과 외로움의 나날들이었다. 그 괴로웠던 지난 날들의 슬픔을 누가 알아주랴…, 어머니 슬픈 통곡 소리로 날마다 목이 메게 울며 눈물로 밥을 말아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 나에겐 왜 아버지가 없을까?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하여 만족할 수만은 없지만 그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소극적이고 미미하다. 갈증이 심하다. 언제 그 많은 신청자들의 진실을 밝혀 한을 풀어 줄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무릇 모든 일에는 처리 계획이 있을 텐데 처리기간 안에 진실이 규명될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재 영암군의 진실규명 상황을 들춰보면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하여 590명의 신청서를 유족회에서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했다. 작년 말에 22명, 올해 9월 110명, 엊그제 21명 등 총 153명이 결정됐다. 적대세력에 의한 진실규명은 238명 중에서 작년 8월 133명이 결정됐다. 결정문을 받은 유족은 현재 286명이다. 상해자, 소멸시효자, 교도소 희생자, 행불자는 모두 35명인데 한 명도 결정되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자녀는 부모를 잃고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여 어느 산골짜기에서 어떻게 죽임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뼈 한 조각조차 거두지 못한 기막힌 사연을 누가 알아주며 증거 불충분으로 진실을 밝히는 일을 뒤로 미룬다면 어찌 진실화해위원회의 옳은 처사인지? 희생자 자식들이 늙어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너희 아버지는 적대 세력자가 아니었다. 부역자나 부역 혐의자가 아니었다.’라고 진실을 확실히 규명해 주어야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지 않을까?

‘부역자’는 당시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부역 행위를 한 ‘범법자’로 확인된 민간인을 말한다. 반면 ‘부역 혐의자’는 당시 사법부에 의해 아무런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부역했을 것이라고 의심이 드는 민간인을 말한다. ‘혐의’에 대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있으리라는 의심을 말하며 ‘혐의자’는 법적으로 피해자 신분이므로 처벌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부역 혐의자’는 당시 법률에 근거하여 ‘부역 혐의를 저지른 사실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자’로 정의할 수 있으며 재판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처벌도 받아서는 안 되는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옆구리에 죽창을 들이대고 총칼로 쑤실 때 먹을 것을 안 내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에게 동조했으니 부역자란 말인가? 밤에는 적대 세력에게 당하고 낮에는 그들에게 동조했다고 가차 없이 경찰에게 죽임을 당했다.

진실규명결정서 책자를 살펴보면 이것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태반이다. 어찌 군경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진실을 규명하여 배·보상의 길이 열리게 하고, 군경의 가족이나 공무원, 부자로 살던 사람들은 적대 세력들에게 한 집안이 몰살당했어도 죽음의 진실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인가? 피해나 희생된 사실보다 가해자에 따라 진실을 규명한다면 그 척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나주부대 사건 같은 경우는 경찰이 적대세력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적대세력 동료들을 불러내어 희생시켰다고 한다. 사실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어린 핏덩이들이 경찰과 적대세력을 구별할 수 있었겠으며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며 살상을 저질렀겠는가? 가해자가 누구이던지 희생된 사람만을 보고 판단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하루빨리 빠짐없이 진실을 규명하여 주기를 바라고 규명해야 할 시간이 부족하면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발 벗고 나서서 국가와 국회에 조사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해 주기 바란다. 현행 특별법에는 내년 5월 26일까지 진행하고 1년 연장할 수 있도록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전수(全數)를 규명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다면 큰일이 아닌가? 반드시 기간 안에 신청인들의 진실을 규명해 줄 것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간곡히 부탁한다.
우리 유족들은 부모·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 땅에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에 촉구하고, 탄원하며 교과서에 수록하여 후대까지 전쟁 피해의 참혹함을 알려야 한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말을 교훈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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