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용 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전 초등학교장​​​​​​​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신 용 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 전 초등학교장​​​​​​​
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간(肝) 이식 수술 후 9년째이다. 40여 년 전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는 통보 이후로, 해마다 두 번씩 받은 간 검사에서 별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안주하곤 했던 게 한 해 두 해, 그러다가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후 더 많은 욕심과 활동으로 내 몸을 혹사한 게 화근이 되었던지, 교사 시절 어느 날 출근하는 도중에 거의 의식을 잃고 차에서 내려 도로변에서 몇 시간 동안을 누워있다가 다시 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그날 오후 더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 가니 간이 크게 상했다며 바로 입원시켰다. “간염을 우습게 알고 방치하면 30년쯤 후에는 암이 되기 쉽다”는 당시 의사의 경고는 그냥 한 귀로 흘려버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었다 싶다. 

정년 퇴임하고 법원의 조정 일과 학교와 기관 등을 다니면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전문 강사로 이틀이 멀다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무리를 한 탓인지 피곤함이 심해졌다.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며칠 후 아내와 큰아들과 함께 가서 확인한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간암이라고 했다. 초기이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색전술이니 고주파니 하는 치료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식만이 확실한 최후의 방법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난 내 나름의 판단으로 3일 후에 색전술을 예약하고 집으로 오는 데 별의별 상념들로 혼미해지려는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큰아들이 동생들에게 얘기했던 모양이다. 간 이식만이 아빠를 살릴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는 설명을 들은 작은아들이 자기가 간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형은 술자리가 잦고 사업을 해야 하니 안되고 자기가 적격이라 했다. 난 극구 반대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큰 다행이고, 그 일을 자기가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라고 어찌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랴. 그러나 ‘나로 인해 혹여 자식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번뇌가 교차하는 곤혹의 나날이었다. 이토록 중차대한 결정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그래, 자식이 당신 살리겠다고 저리하니 그렇게 합시다” 나와 아들이 입원하여 모든 검사를 받은 이후 수술하는 날이다. 먼저 아들을 마취시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평온했다. 그러나 내 가슴은 울컥했다. 지금에라도 안돼! 소리치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마취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술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개복하고 곧바로 쓸개까지 제거한 후 마지막 검사인 간 조직검사에서, 미세한 지방간 판명이 되어 다시 배를 꿰매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했지만, 자기들도 어찌하는 수가 없는 극히 드문 경우라는 말만 했다. 이제 간 이식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일반적인 치료를 받겠다고 의사와 상의했다. 그때였다. 이런 사정을 다 듣고 있던 딸이 이제는 자기가 간을 주겠노라며 나섰다. 우린 모두가 그건 아니라고 했다. 당시 딸은 결혼하여 출산한 지 겨우 한 돌이 조금 지난 뒤라 아직 제 몸 하나 온전히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럴 수는 없다고 반대했지만, 딸의 의지 또한 강했다. “나도 자식이에요!” 단호하게 왈가왈부에 쐐기를 박았던 이 한마디 말을 생각할 적마다 지금도 마냥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적셔지곤 한다.

“우리 딸! 정말 고맙다. 그렇지만, 너는 시부모님이 계시고 또 남편이 있으니 네 뜻대로만 할 수는 없다”라며 어르고 달래었다. 항상 철부지 막내로만 생각했던 딸은 시댁 부모님과 남편의 허락을 받아오겠다며 집으로 갔다. 그 이튿날 새벽같이 달려온 딸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했다. 모두 흔쾌히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먼저 사돈어른께 전화했다.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를 살리겠다니 이런 효녀를 둔 내 마음은 더 흐뭇하고 기쁩니다”라고 하셨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사돈 내외분의 흔쾌한 결정도 오늘의 내가 있게 해주신 큰 은공임을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곧이어 사위에게 전화했다. “딸은 자식이 아닙니까?” 평소 말이 별로 없어 무심하다고 여겨왔던 고 서방의 첫마디였다. 사위의 타고난 과묵한 성격은 지금이라고 크게 변할 수는 없겠지만, 바른 행동과 고운 심성이 항상 진실하고 변함이 없어서 난 이런 고 서방이 너무 믿음직스러워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 난 딸의 생명과 함께하고 있다. 수술을 맡은 의사나 간호사분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이들을 칭찬하곤 했다. 오직 아빠를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웃음 띤 얼굴로 수술대에 오르는 얼굴에서 미소로 가득한 예는 없었다며, 자식들을 참으로 잘 두셨다고 했다. 그렇다. 난 자식 복이 너무 많은 아빠임이 분명하다. 자식 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입원해 있으면서 휴게실에 가면 신장이나 간을 이식한 환자들과의 대화 중에 내 아내의 판단과 결행을 모두 부러워했다. 암이라고 판정이 되는 날부터 이식에 대한 문제는 가족 간에 논의의 핵심이고, 이로 인한 갈등은 어느 가정이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최대 난제라는 것도 알았다. 처음 부모가 암이라는 판정 직후에는 자녀들이 서로 자기가 간을 제공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소리냐?”라며, “그래도 당신은 이만큼 살았는데, 멀쩡한 자식놈의 생간을 떼버리면 앞길이 창창한 자식은 어찌 될 줄 누가 알겠나”라는 아내의 야멸찬 한마디면 자식의 간 공여는 순간에 없었던 일로 되고 말아 이식하지 못하다 보니, 이제는 점점 암이 악화하여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음에 놀랐다. 자식들 또한 아무리 낳아 길러준 부모라지만 불안과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결혼하면 혼자가 아니니 더욱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간암의 경우에 이식을 받아야 하는 국내의 대기자가 6천 명이 넘지만, 실제 이식은 연간 450건 정도라 한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외래병동 한쪽 벽면에는 매년 간을 제공해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판이 있다. 해마다 그 숫자가 줄고 있고 작년에는 20명도 채 못되었다. 환자는 매년 늘고 있다는데 말이다.

“이식의 성공 여부는 의사도 아니고 가족 간의 믿음과 애정이다” 당시 가볍게 들었던 어느 간호사의 이 한마디 말이 살아갈수록 짙게 울려온다.

검은 토끼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물처럼 흘러간 세월이라지만 어찌 이런저런 사연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잘 견뎌내고 잘 이겨온 것은 오직 소중한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뿐이다. 가족의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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