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용 배  

 덕진면 노송리출생
​​​​​​ 전 초등학교장
 전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죽은 자의 소원

얼마 전에 선배의 부인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선배님! 사모님 보내시고 후회되는 것이 있나요?” 핼쑥해진 선배에게 식탁에 둘러앉은 함께 간 후배 중 한 사람이 불쑥 물었다. “어찌 한두 가지겠나.” 평소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아 의아했다. “그럼 가장 후회되시는 것이 뭔가요?”

난 순간적으로 헤아려보았다. ‘젊었을 적에 얄팍한 월급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것일까.’ ‘아니다 선배는 유별난 애주가셨지. 그 일로 자주 가정에 불화가 있었다는 말을 자주 했으니 그 문제가 아닐까.’ 

그런데 선배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건 말이야, 아내와 따뜻한 얘기 한번 나눠본 적이 없이 보내버린 거야.” “아니 선배님! 누구나 다 이런 저런 얘기하며 사는 거지 무슨 특별한 대화란 게 따로 있나요?” 내가 물었다. “집사람은 여보라고 불러주는 그 말 한마디 듣는 게 소원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지.” 그러나 끝내 듣지 못하고 가버리니 이제 와 너무 가슴을 에인다 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셨어요?” 어이! 어이! 가 일상이었고, 간혹 여기 봐! 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그거야 뭐 우리 고향에서 나이 든 남자들이 아내를 부르는 일상적인 말이기에 그걸 듣고 자란 우리에겐 큰 허물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며 위안이랍시고 거들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한 게 있다고 했다. 식사 중에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며 기침마저도 금기로 했던 아버지의 엄한 훈육이 몸에 배어서인지 자기 또한 식사 때도 아내와 말 한마디 없이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도 이건 식사할 때만 참으면 되었겠지만, 평상시에도 자기가 한번 내뱉는 말이면 일절 토를 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아내의 의견이 설혹 정당하고 옳은 말일지라도 그냥 무시하고 밀어붙였다고 했다. 자기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며 어설픈 웃음으로 해명을 했다. 하긴 어쩌다 만나는 자리나 모임에서 얼핏 보아도 남의 의견보다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고집스러운 성격이 남다르기도 했기에 쉽게 수긍이 갔다. “사모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셨을 거다.”는 등등 우리는 선배를 심하게 공격했다.

아니 그런데 혹독한 후배들의 질타에도 대꾸 한마디 없더니, 갑자기 고개를 떨구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옆에 앉은 후배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음식이 차례진 상위로 닭똥 같은 눈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선배는 그렇게 한참이나 눈물을 떨구었다.

씁쓸한 자랑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더라도 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부터는 부부간에 별로 할 말이 없다고들 했다. 밥을 먹을 때만 마주 보는 얼굴이고, 서로가 거처하는 방도 잠자는 곳도 거실과 큰방으로 나누어져 언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소멸하는 게 현실인 듯했다. 매일 오르는 산의 약수터엔 낮에는 대부분이 노인들의 전유 터다. 어느 노인 한 분이 구수한 입담으로 좌중을 웃게 했다. 너무 할 말이 없다 싶어서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여보! 밤새 잘 잤어?” “아니 오늘따라 왜 이리 이뻐?”라며 큰 선심(?) 한번 썼더니, “별일이네. 오늘 웬일이야?” “뭔가 뒤가 구린 게 있나?”라고 핀잔을 받았다 했다. 너도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들을 자랑하듯이 이어가는 걸 들으며 씁쓸하기도 했다. 아마 몇십 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겪어온 좋은 일 즐거운 일 행복한 일보다는, 더 많고 더 깊은 삶의 질곡들로 점철된 나이테가 너무 단단한 선으로 박혀있어서일 게다. 

타산지석(他山之石)
영원한 반려자인 부부간에 눈만 뜨면 주고받아야 하는 게 대화일진대, 이보다 더 소중한 게 뭐가 있을까? 갑자기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여보!” 다정스레 불러야지’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야지’ ‘눈을 보고 웃음 띤 얼굴로 진지하게 들어야지’ ‘아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야지’ ‘하찮은 말에도 칭찬하며 손뼉도 쳐야지’ 
사람이 사는 방법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곧 말이요 대화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공감하고 호감을 나타내는 최고의 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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