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 전 목포시 교육장
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나는 거의 매일 영산강을 느끼며 산다. 남악에서부터 영산강을 보고, 영산강 지류 서호강물을 퍼 채소를 가꾸고,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물을 막아 만든 더부내 정수장 수돗물을 마신다. 영산강은 내 생활이고 내 삶이다. 영산강은 담양 병풍산 북쪽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도 땅 삼백오십 리를 흐른다. 영산강 유역은 자그마치 백만 평에 이른다. 영산강의 좁고 넓은 물굽이는 한 마리 큰 구렁이가 되어 이리저리 산비탈과 들을 감고 돈다. 영산강은 남도 땅 젖줄이고 남도 땅에서 삶을 이어가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후삼국 시대 견훤은 영산강을 잃어 나라를 빼앗겼고, 왕건은 영산강을 얻어 후삼국을 통일했다. 기진맥진한 이순신은 포근히 감싸주는 영산강 민초들에 힘입어 다시 수군을 일으켰고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했다. 서해에서 영산포까지 배가 드나들었고 영산강 물을 포장도로 삼아 겹겹이 묻혀있는 남도 땅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연결했다. 그 옛날에는 영산창이 있어 54척의 조운선이 영산강을 통해 개성으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날랐다. 돛대가 하나 달린 야거리라는 작은 배도 영산강을 따라 흔들리며 드나들었다. 영산강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흑산도 어부들은 흑산도에 있는 영산도와 그 인근을 영산포라고 부르는데 자신들의 삶을 의탁한 뭍에 그 이름을 가져왔고, 그 이름 영산포에서 영산강이 유래했다. 

나는 퇴직해 내 삶터 주변을 서성이면서 더 절절히 영산강을 느끼며 산다. 학파농장 드넓은 논에 들어오는 물을 보고 고마움을 느끼고, 영산강 하류 금강리와 태백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영산강물 소용돌이를 보며 두려움도 느낀다. 잔물결 가득한 영산강이지만 홍수가 나면 하류의 물살은 도도해지며 까마득한 그 옛날을 오늘로 가져온다. 유구한 그 세월 동안 저렇게 도도하게 흘렀을 영산강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영산강을 노래한 ‘영산강 처녀’는 송춘희 씨가 1964년에 발표했다. 영산강 구비 도는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님, 똑딱선 서울 간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송춘희 씨가 노래한 영산강 처녀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내가 사는 영산강 유역 아시내에는 노인분들만 있다. 영산강 하류 금강리 황촌에도 택백리 백운동에도 처녀는 없다. 영산강을 무대로 쓴 소설이 문순태 씨의 ‘타오르는 강’이다. ‘타오르는 강’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로 자유의 몸이 된 나주지역 젊은 노비들이 자신들의 땅을 일구기 위해 영산강 새끼내로 들어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유인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노비세습제도 폐지를 시작으로 동학농민전쟁, 목포개항, 을사늑결, 한일합방, 학생독립운동을 거치며 주인공 웅보의 집안을 중심으로 유장하게 펼쳐진다. 구한말 나주 농민의 땅 4만5천 마지기가 조선 조정의 엄귀비(경선궁) 소유로 되었다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 소유로 넘어가 버리는 사건을 배경 삼아 조선 무지렁이 농사꾼들의 피맺힌 절규 또한 그려낸다.

영암에서 목포로 들어오며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강이라기보다는 내륙의 바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영산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악의 위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와 접해 있는 영산강 하류에서 시작한 고층 아파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영산강을 휘감아 돌아가고 있다. 그 옛날 왕건을 태운 함대가 지났을 그 곳에, 영산창의 조곡을 실은 54척의 조운선이 지났을 그 곳에, 또 흑산도 민초들이 야거리에 홍어를 싣고 지났을 그 곳에, 이름도 아름다운 무영대교가 서 있고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나주시는 지금 왕건과 장화왕후를 뮤지컬로 환생시키며 영산강은 살아있다고 외친다. 해질 무렵, 내가 사는 아시내를 출발해 학파동과 무송동을 거쳐 영산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금강마을에 이르고 다시 태평정에 도달해 은적산과 영산강이 만들어 놓은 강변도로를 달린다. 무영대교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을 다시 바라본다. 영산강이 은빛 비늘을 일으키며 한 마리 커다란 용이 되어 동쪽 월출산 쪽부터 꿈틀거린다. 담양에서부터 도움닫기를 시작한 영산강용은 머지않아 주룡나루의 여의주를 물고 남도의 혈이 응축된 남악에서 승천하여 서해로 남해로 태평양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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