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용 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 수원지방법원 조정위원

웬일인지 최근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에도 소름이 끼치는 사건·사고들의 소식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냥 해보고 싶어서 저질렀다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강력 범죄들이, 우리의 주위에서 전혀 모르는 남이 언제든지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 6시와 저녁 8시면 아파트 근방의 산책길을 걷는다. 내 나이에 건강을 지키는 딱히 할 수 있는 운동이 보폭을 좀 넓히고 양팔을 반쯤 오므려 힘있게 전후로 저으면서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걷는 것밖에는 없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제법 다리에 힘도 붙고 한결 몸이 가벼움도 느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 편히 걷지를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떨구질 못한다. 빠르게 걷다가도 저 앞쪽에서 젊은 사람이 걸어오거나 특히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고 옷차림새가 괴상하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면서 길 한쪽으로 붙여서 지나치는 버릇이 생겼다. 뿐인가. 뒤에서 달려오거나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에는 더욱 신경이 쓰여 괜히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며 괜히 헛기침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지우려 한다. ‘묻지 마’에 대한 공포다. 이유도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갑자기 당하는 폭행이나 흉기 난동을 넘어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부터 생기게 된 삶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불안감이다. ‘매슬로’는 인간의 5대 욕구 중에서 기초적인 생명을 유지하려는 욕구 다음으로 위험이나 사고 같은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안전에 대한 욕구라 하였다. 최근 영국의 BBC방송이 “한국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 마’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는 보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그래도 한국은 OECD 회원국의 평균에 비해 범죄율이 절반에 그쳐 여전히 안전한 나라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이런 기사에 고무되고 안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묻지 마’ 범죄의 원인으로 불안정한 일자리와 힘든 주거 마련 그리고 불평등한 상대적 박탈감 등 우리나라의 근본적인 비사회적인 대접과 압박을 지적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이고 안이한 결론이어서 “아! 정말 그렇구나.” 하며 이해하거나 공감을 갖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접근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한 근본적인 요인은 뭐라 보느냐?’ 자신에게 묻는다. 그건 바로 나다. 그래, 오직 나에게 있다. 최근에 정치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그래서 뉴스는 아예 안 본다는 원성도 있지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 정도의 소용돌이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조선 개국 이래로 외세로부터 960여 차례나 침략을 받았지만 모두 승리했다. 하물며 몽골침략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뼈 아픈 고난도 결국 물리치고 이겨냈다. 이때마다 나라를 지키고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오직 목숨을 바쳐 싸운 백성들의 힘이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백성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개개인의 굳건한 의지와 머뭇거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 하나만 살아보겠다고 숨거나 도망치질 않는 의지들이 모여서 거대한 외세를 이긴 것이다. 그랬던 우리가 지금은 어떠한가? 자고 나면 들리는 뉴스마다 눈에 들어오는 신문의 기사들이 어지럽고 불안한 소식들을 전한다. 사람 사는 근본이 자꾸만 흔들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근본이란 게 뭐 대단한 제도나 정책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다. 일상 접하게 되는 작은 사례 몇 가지만 들어보자. 산책길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발길에 차이는 담배꽁초는 아무리 주워도 끝이 없고, 이젠 동반자가 된 강아지가 배설한 오물을 치우지도 않고 태연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그렇다. 우회전하려고 길게 늘어 서 있는 차들 옆으로 씽씽 달려와 IC 바로 직전에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얌체 운전자는 또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한 것인 줄을 알지만 그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럼없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 사람 사는 곳에 어찌 원칙과 기본만이 절대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탈적인 행동들은 그래도 이해하며 용납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고 양심의 문제다. 자기 혼자만 잘해봐야 손해를 보는 세상이라는 생각은 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기만하고 속이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국제기구 및 세계은행에서도 고소득 국가로 분류하고 있으며, 10위 권을 오르내리는 선진국으로 소개되고 있다. 작년의 국가통계를 보면 3만 몇천 달러를 상회하는 국민 개인의 소득으로 명실공히 잘 사는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삶의 질에서는 세계의 국가 중에 겨우 중위권의 앞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경제와 IT 강국에 한류 선풍으로 어느 나라를 가든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인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유는 무엇일까. 이 또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나에게 있다.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음에도 뭔가가 부족하고, 내가 생활하는 데 별 걸림돌이 없는데도 아직은 성에 차지 않는 불평과 불만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가?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나에게서 나오고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의 결과라는 사실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모든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남기신 명언 중의 한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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