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조귀순 여사는 아시내에서 불쌍하게 살다간 여인이다. 청상과부가 되어 아무것도 없는 살림살이에서도 삼 형제를 잘 길러낸 전설 같은 얘기의 주인공이다. 나로서는 집안의 형수뻘이라 그런지 조 여사의 귀천이 가슴 아팠다. 이대로 보낼 수만은 없어 인터넷 비(碑)라도 세워주자는 심정으로 조 여사에 관한 글을 썼다. 블로그에 올리고 신문에 내려고 썼는데, 한 인생에 관한 글이다 보니 아들들의 동의가 필요할 것 같아 막내아들에게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초안을 보냈다. 며칠이 지나자 응답이 왔는데 조 여사가 장한 어버이상도 탄 적이 있다며 감사하다는 반응이었다. 삼 형제가 글을 돌려보고 의견을 교환하고는 공개에 동의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래 나는 장한 어버이상에 관한 내용을 첨삭하여 글을 완성한 후 신문에 기고했고 블로그에 올렸다. 절대빈곤의 시절 억척스럽게 살아낸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내 글치고는 독자들의 반응이 꽤 뜨거웠다. 결국, 내 글이 조 여사의 인터넷 비(碑)가 된 셈이다. 

그러다 조 여사가 잠시도 떠나지 않고 살다간 아시내 이지만 그녀의 세 아들들은 더 이상 아시내를 찾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엉뚱하게도 평생을 살다간 아시내에 조 여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시내 입구에 귀천한 조 여사 이름으로 돌 솟대 한 개를 기증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막내아들에게 권해봤다. 그러자 삼 형제가 의논한 끝에 그렇게 하겠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네 분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렸고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조 여사 비(碑)를 세운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새기고 세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동네 입구 가장 좋은 곳에 돌 솟대를 세웠다. 

추석을 맞아 삼호 납골원에 모셔진 아버지 어머니를 뵙고 또 기증한 돌 솟대를 직접 보기 위해 조 여사 삼 형제가 아시내를 찾았고, 나를 만나기 위해 집에 들렀다. 찻잔을 놓고 상당 기간 정담을 나누며 돌 솟대 기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기증을 하기 전 보다 기증을 하고 난 후 그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다는 것이었다. 특히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살다시피 한 둘째 아들이 돌 솟대 기증을 너무나 뿌듯해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아시내를 찾은 그 삼 형제는 이미 어머니가 돼 버린 그 돌 솟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인간의 욕구에 관한 연구를 한 아브람함 메슬로(Abraham Maslow 1908~1970)가 1943년에 발표한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 중 가장 상위의 욕구가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했다. 번안해 영어로 To give stage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상대에게 그 무엇을 해주어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행복해지는 단계를 일컫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경지에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을 향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의 영역과 통하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살았는데도 세상과 이웃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더라는 경지를 말한다. 매슬로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달성한 사람들이 느끼는 최상의 상태를 지고경험(至高經驗)이라고 표현했다.     

조 여사의 육신은 아시내를 떠났지만 조 여사의 혼(魂)은 그녀의 아들들이 조 여사 이름으로 기증한 돌 솟대를 통해 아시내에 남아 오래도록 아시내를 지켜줄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 이름으로 기증을 해 놓고 매슬로가 표현한 지고경험(至高經驗)을 한 것 마냥 너무나 좋아하는 세 아들들의 흐뭇해하는 모습이 나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고인이 된 조 여사가 돌 솟대를 기증하자 아시내를 살다간 다른 고인들도 이어서 돌 솟대를 기증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그 결과 아시내는 아름다운 돌 솟대를 여섯 개나 품을 수 있게 됐다. 여러 망자의 바람대로 돌 솟대에 내려앉은 오리 여섯 마리는 물·불·바람을 막아주는 아시내의 수호신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아시내 이곳저곳에 대나무 솟대를 세운 지 여섯 해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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