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용 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 전 초등학교장
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부천에서 교감 첫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방학 때의 관리자는 별도로 근무를 교대해서 하던 때라 나는 광주 집으로 내려와 쉬었다가 일요일 저녁이면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모처럼 지난날 나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몇몇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내다 보니 할 수 없이 다음 날 새벽 4시에 집을 나서게 되었다. 월요일 아침 8시 반까지는 학교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호남선과 경부선이 만나기 미쳐 못 가서 있는 계룡휴게소를 지나면 큰 강줄기 위로 기다란 다리가 있다.

강 주변이라 짙은 안개는 시야를 좁혔고 게다가 졸음까지 와 신경을 써야 했는데, 하필이면 다리를 넘어서면서부터는 휘어진 도로가 경사까지 심한 곳이다. 새벽이라 앞서가는 차들이 없기에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오르막을 힘차게 올라 내리막으로 접어 드려는 그때였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바로 코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언덕배기 정상에서 이제 막 내려가려는 트럭이 미쳐 속력을 내지 못하였고 거기에 짙은 안개까지 겹쳤으니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이제 난 죽었구나!’ 딱 이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짐을 가득 실은 30t 트럭 뒤에서 추돌하여 트럭 밑으로 들어간 뒤에 다시 튕겨 나와 옆 옹벽을 들이받고 나서야 멈춘 거라 했다. “드르륵! 드르륵!” 요란스러운 기계의 굉음에 이어 “어! 살았어 숨 쉰다” “팔도 움직여” 구급대원의 긴박한 소리를 아스라이 들은 듯 다시 정신을 잃었다.

대전 어느 병원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두 눈과 입만 빠끔히 남겨둔 채로 머리에서 얼굴 전체가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하얀 와이셔츠는 온통 붉은 핏자국으로 꽃물을 들인 듯했다. 조금 안정이 되니 ‘내 차는 어떻게 되었을까?’ ‘운전하고 학교로 가야 하는데…’ 이게 너무 궁금하고 불안했다. 달려온 온 아내 그리고 동료와 함께 내 차가 있다는 공업사로 갔다. 2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세요?” “저∼, 오늘 새벽에 사고 난 차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요” 더듬거리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러면 지금 저분이 운전하신 분인가요?” 나를 가리키며 어안이 벙벙한 듯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자동차 정비 생활 25년째라며 새벽에 들어온 차 한 대 있는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 했고, 더군다나 운전자가 제 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오다니 이건 기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조상님께서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옆에 있던 다른 직원도 한마디 했다. “그럼 우리 차는 어디에 있나요?” 사장을 따라 마당 어느 한 귀퉁이로 갔다. “이 찹니다” 우린 경악했다. 검은색 세피아가 맞고, 삐죽하게 내민 차의 뒤 마지막 두 개의 번호가 분명 내 차였다. 차 전체가 신문지를 구겨 놓은 듯했다. 사장의 설명으로는 트럭 뒷부분을 추돌하면서 내 차의 앞부분이 망가지고, 그때 차는 트럭 밑으로 들어가면서 지붕이 걷히게 되었다고 했다. 참 신기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처참히 박살 난 차를 앞에 두고,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났나?’ 나는 줄곧 이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여보! 이 의자 좀 봐요” 아내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내가 앉았던 운전석 의자였다. 일자로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게 아닌가. 그때야 사장도 트럭을 강력하게 추돌하는 순간에 의자가 뒤로 완전히 젖혀진 것으로 보인다 했다. 차 지붕이 벗겨 나가는 순간에 나는 뒤로 누웠고, 그때 차 파편들이 머리와 얼굴들을 할퀴고 지나간 것이라 했다. ‘만약 의자가 뒤로 젖히지 않았더라면?’ 차 지붕이 그대로 걷혀 구겨지는 충격이었으니, 어떤 불행한 사고로 이어졌을 것인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와싹 소름이 돋는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죽을 고비를 넘긴 8월이면 고향 다녀오는 길에 반드시 그 장소를 지나온다. 그때마다 살아있는 생명에 감사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사고가 났던 옹벽에 ‘접촉’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붉은 글씨가 선명히 보였는데, 지금은 지워져 가슴으로만 느끼며 지나간다. 

“자동차가 널 살렸구나”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린 결론이다. 당시엔 애들 교육 문제로 나만 떨어져 살았다. 주말에 광주의 집으로 가서 골목길 옆 담 밑에 주차를 해두곤 했다. “희야!(딸 이름) 네 아빠 차 무슨 색이냐?” 어느 날 우리 집 건너편에 사는 딸 친구가 묻더란다. “그야, 검정이지. 늘 보면서 그래?” “근데 말이야, 얼마 안 있으면 하얀색이 될 거다.” 그랬다. 집에만 오면 세차하고 잠시만 나갔다 들어와서도 또 닦는 걸 보면서 한 우스갯소리였다. 지금도 지인들은 10년이 넘은 내 차를 바로 엊그제 산 차 같다고들 한다. 그 소릴 듣는 나도 웃고 차도 웃는듯하다. 나는 내 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건 내 목숨을 책임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운전 전에 차 문을 열면서 “오늘도 안전!” 말하고, 외출 후면 “수고했다.”라며 툭툭 가볍게 쓰다듬는다. 차도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교감을 느낀다. 비록 쇳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물건이지만 감정을 공유하며 대화를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크고 작은 자동차 사고를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자기는 망가져도 주인에겐 상처 하나 주지 않았다. 차에 대한 애정을 갖고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내 차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어찌 차 뿐이랴. 들녘에서 흔들거리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도, 산길에서 발부리에 치이는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고 생명이 있다. 그냥 보면 풀이요 돌이지만 그들에게도 모진 비바람에 견뎌온 각고의 흔적들과 생존의 의지가 역력하다. 이들도 아끼고 보살피면 화답하고 배은하지 않는다. 보은은 사람이 사람다움의 근본이다. 주는 대로 받고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사람 사는 이치라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보은은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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