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서호면 몽해리
  전 목포시 교육장
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사는 아시내에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있는 한석봉 어머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난 사자가 돌을 깨뜨리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달리는 것 같다’는 붓글씨를 쓴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가 아천 포구가 있는 아시내에서 떡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사실 내 유년 시절만 하더라도 아천 포구는 실체가 있었다. 집도 몇 가호 정도 있었고 여름이면 거의 매일 미역을 감던 아천포에는 배를 묶어두었다는 나무 말뚝이 물속에 많이 박혀있었다. 아천포에서 가까운 화소장터라고 불리우는 모래벌판에서는 큰 씨름판과 투전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더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곳에 주재소가 있었고 드나드는 배들로 상당히 복작거렸다는 것을 여러 어르신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분명 아천포는 포구의 역할을 했고 일정 수준의 상거래 활동이 있었던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천포는 영산강을 통해 어느 포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리라. 

한석봉은 청주 한씨에서 분적된 안변 한씨, 다시 안변 한씨에서 분적된 삼화 한씨로 1543년에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나 1605년에 경기도 가평군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이곳 아시내를 근거로 글씨 공부를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증이 발동한다. 추리해본다면 석봉은 아버지 한언공(韓彦恭)이 1546년 22세로 요절하자 홍주 백씨 백옥근의 딸인 어머니 백인당 백씨를 따라 영암으로 왔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친구였던 화담 서경덕의 소개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아시내로 왔다고 되어있는데, 도대체 그 무렵 그 스승이란 분이 누구였을까. 영암땅 영보에서 난 거창 신씨 영계(濚溪) 신희남(愼喜男 1517~1591)이라는 것이다. 신희남은 18세 무렵인 1535년경에 화담 서경덕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신희남은 1543년 소과인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대과를 준비하던 때에 함경도 안변으로 귀양 갔다. 1551년에 풀려나 개성으로 돌아온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을 찾아갔고, 간 김에 서경덕을 만나 개성의 영재로 소문난 석봉을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주에 감탄한 나머지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물론 서경덕의 부탁도 있었고 백인당의 간절한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 석봉은 나이 12세인 1555년경에 영암땅 영보 죽림정사로 와 신희남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석봉의 뒷바라지를 위해 백인당도 영암땅으로 왔고 그곳이 아천 포구이고 지금의 아시내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70여 년 전인데 그때 백인당은 아천 포구 근동에 기거하면서 개성에서부터 생활수단으로 했던 떡을 해 사람 많은 곳을 돌면서 떡 장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화제의 백인당 떡 썰기 한판 승부는 19세기 말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 동야휘집(東野彙輯)이 출처인데 그 무대가 이곳 아시내는 아닌 것 같다. 석봉이 죽림정사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해 1555년 스승인 신희남이 대과인 식년문과에 급제하게 되는데 아마 그 때부터 신희남이 관직에 나갈 때까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신희남이 관직으로 나아가자 신희남이 소개한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공부를 계속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공부한 장소는 성소나 마찬가지라 석봉 역시 그곳 죽림정사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리라. 그리고 그런 석봉을 후원하기 위해 백인당 역시 아시내에서 인고의 떡 장사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명종 22년 1567년 석봉의 나이 24살 즈음 소과인 진사시에 합격해 공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사자관이라는 하급관리에 임용됐다. 

나는 여기에서 사실과 추측으로 비벼낸 역사 쓰기를 멈춘다. 임진왜란의 외교 실무자이자 천하의 명필 석봉이 한동안이나마 아시내와 연을 맺고 살았고, 사모곡의 주인공인 어머니 백인당이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오직 자식 뒷바라지에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떡 장사를 했던 그 무대가 다른 곳이 아닌 아시내였다는 점이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는다. 분명 나의 선대들은 석봉 어머니 떡을 한 개라도 사 먹었을 것이고, 그 떡에서 나온 고물이 불멸의 한석봉 천자문을 낳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전율이 느껴진다. 

아무튼, 아시내는 석봉 어머니가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떡 장사를 했던 곳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곳인데, 250년이 지난 1800년대 때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전설처럼 전해졌고, 고조부모님 때는 뚜렷하게 전해지다 나는 부모 연배의 어르신들에게 직접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천자문 글씨가 한석봉 체여서 서당밖에 달리 교육기관이 없었던 시절, 우리네 조상님들의 뇌리가 한석봉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시내 한석봉! 그것이 설사 전설일지라도 아시내 사람인 나를 황홀경에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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