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62] 검정 교과서의 마한사 서술 확대 논의(하)

지난 7월 7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마한 역사의 교과서 서술 확대 방안’ 세미나가 월출산기찬랜드 내 트로트센터 공연장에서 200석 좌석을 거의 채울 정도로 커다란 관심 속에서 열렸다. 우승희 군수와 강찬원 의장 그리고 도의원, 군의원 여러분이 참석해 행사의 의미를 더욱 빛냈다. 나주·광주 등지에서도 마한에 관심이 많은 인사, 그리고 순천, 함평, 장흥, 목포, 나주 등 여러 지역의 교장, 역사 교사들도 참석하였다. 

이처럼 마한 역사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뜨거운 열정은 마한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은 집필자, 토론자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 필자는 이들에게 ‘영암 마한’을 중심으로 한 마한의 정체성과 최근의 연구성과를 설명하여 공감을 이끌어 냈다. 특히 교과서 집필자들인 발표자·토론자들과 오찬을 하며 영암군의 마한사 복원과 세계유산 등재를 중심으로 ‘역사 관광도시, 영암’의 비전을 설명한 우승희 군수의 열정 역시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세미나와 이어진 토론에서 나온 얘기들은 다음 호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오늘은 지난 호에 이어 검정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2009 교육과정 교과서 서술

첫 검인정 체제가 적용된 2009 교육과정 교과서 서술에서 다양한 학설이 소개되기를 기대하였으나 이전 국정 교과서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 전남대 조영광 교수도 인용한 내용이지만, 일선 고등학교에서 당시 가장 많이 선택한 출판사의 마한 서술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 과정에서 진은 고조선의 방해를 받았다. 이후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유민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었고,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 결과 마한·진한·변한이 성립되어 이들은 삼한이라는 연맹체로 성장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한 마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목지국이 가장 강성하여 삼한 전체를 이끄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에서는 신지·읍차 등으로 불리는 군장 세력이 성장하였고, 종교적 지배자로는 천군이 있었다. 천군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고, 신성 구역인 소도를 다스렸다. 소도에는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이 지역에 범죄자가 들어가도 잡아갈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삼한은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벼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삼한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밭이나 논과 함께 수로·보(洑)·저수지 등도 조사되었는데, 대표적인 저수지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 등이 있다. 한편,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를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고, 낙랑군·왜 등으로 수출하였다.”

위 내용을 지난 호에 살핀 국정 교과서와 비교해보면 목지국이 삼한 전체를 주도하는 세력이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등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한 교과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절의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백제’라는 항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삼국 간의 항쟁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장악한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마한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여 지금의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남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어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2015 교육과정’의 마한 서술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남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충청·전라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전 국정 교과서와 비교하여 볼 때 ‘전라도 남해안을 차지하였다’라는 표현을 ‘지금의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전라도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여 교묘히 단어만 바꾸었을 뿐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서술 주체가 바뀌고, 그동안 마한 연구가 많이 축적되었다고 하더라도 서술 변화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20년 3월 처음 학교 현장에 투입된 ‘2015 교육과정’의 마한 서술은 더욱 충격적이다.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이라고 소제목을 붙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함경도와 강원도의 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가 성립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었고, 읍군이나 삼로라 불린 군장이 부족을 다스렸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성립하였다. 삼한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여러 소국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각 소국은 신지·읍차 등의 군장이 통치하였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에서 종교 의례를 주관하였다. 이처럼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철기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에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마한지역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 연맹이 성장하였다.”

먼저, 한반도 중남부의 역사를 차지한 삼한(마한)의 역사를 기껏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일대를 차지한 옥저·동예와 비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삼한의 서술 비중이 이전 교과서들보다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서술 분량도 극히 소략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 다른 절의 ‘영토 확장과 왕위 계승의 안정’이라는 주제에서는 “백제는 3세기경 고이왕이 마한의 소국들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은 왕위 계승을 안정시켰다. 또한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 교역하고 왜와 교류하였다.”라고 기술했다.

근초고왕 때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시키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근초고왕 때 마한이 소멸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곧 이전 교과서의 근초고왕 때 ‘전라도 지역을 복속하였다’는 표현 대신에 ‘마한이 소멸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을 알 수 있다. 전라도가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처럼 위 교과서가 이렇게 말재주를 부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20여 년 전부터 전남지역이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고고학적인 물증이 나오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새로운 연구성과를 수용하기는커녕 과거의 낡은 학설을 고집하면서 새로운 연구성과를 교묘히 회피하려는 과정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한다. 여기에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교육부 검정을 통과하기에는 기존 주장을 벗어난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자기 검열’도 한몫하였을 것이다.<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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