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61] 검정 교과서의 마한사 서술 확대 논의(중)

 

시종 옥야리 고분군. 지난 2022년 11월 3일 시종면 옥야리 고분군을 답사한 초당대 국제학부 베트남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시종 옥야리 고분군. 지난 2022년 11월 3일 시종면 옥야리 고분군을 답사한 초당대 국제학부 베트남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앞서 살핀 국정 교과서 체제인 1999년 제정 교과서는 몇 가지 서술의 특징이 있다. 먼저, 삼한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한반도 남부에 성립된 진국에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의 이동으로 진국이 해체되면서 마한·변한·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유이민 이동과정에서 삼한의 성립을 설명한 기존의 이해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이미 한(韓)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 한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때가 기원전 194년이니까 그 무렵에 한(韓)이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한(韓)은 마한을 의미한다.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갈라져 나왔고, 마한인이 변한·진한의 왕을 하였다. 곧 한반도 중남부에는 마한이 이미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다. 

마한 사회의 특성이 드러나야

그런데 마한은 여러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 연맹체를 구성하며 정치·사회·문화적인 발전을 하였다. 마한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발상지가 영산 내해 유역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중국 문헌에서 나타난 여러 사실과 고고학적 유물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마한이 오랫동안 토착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유이민 세력이 고조선에서 이동해왔다. 이들 세력에 의해 토착문화가 쉽게 동화될 정도로 뿌리가 약하거나 문화 수준이 낮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 보이는 문화 요소들을 보면 토착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가미한 흔적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특히 영산강 유역 문화는 토착적 문화를 기반으로 대륙과 해양문화가 서로 융합된 측면이 많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준왕의 남래설(南來說)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한반도 중남부에 독자적인 정치 세력과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였던 마한의 존재를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교과서에 변함없이 반영돼 있다고 하겠다.

다음 서술로 삼한 사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신지·읍차 등이 삼한의 군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곧 삼한은 옥저나 동예처럼 왕이 없어 정치적 발전이 늦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고조선 관련 서술에서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고조선은 중국 연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고, 왕위가 세습되고 관제도 정비되어 중앙집권적 체제의 모습을 보인다”고 되어 있다. 고조선이 중국과 비슷할 정도로 정치단계가 발전되었다고 하면서도 그 이남의 마한이 유독 정치발전이 수 세기 늦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는 비록 기원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거대한 고분과 함께 출토된 금동관·금동신발·용무늬가 새겨진 환도 등은 이 지역의 강력한 정치체의 존재를 쉽게 상상하게 한다. 

삼한의 사회 성격을 다룬 사례로 소도(蘇塗)가 강조되고 있다. 곧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처벌할 수 없다는 중국 기록을 토대로 이 사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기존 토착문화와 새로운 유이민 문화 사이에 나타나는 문화적 충돌을 조화시키는 장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울러 소도는 솟대 신앙과 관계되어 영산강 유역의 고유한 토기인 조족문(鳥足紋) 토기와 어떤 연관성을 보여준다. 필자가 언급한 바 있지만 백제는 사슴을 상징으로 한 반면, 마한은 새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 등이 교과서의 ‘날개’ 부분이나 자료 해설 등에 설명함으로써 마한 사회의 특성이 드러나게 서술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서술의 변화가 없다.

목지국 이동설은 재검토 대상

마지막으로 중심 세력인 목지국이 백제에 밀리어 남으로 이동하여 영산강 유역에 자리 잡은 마한은 6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목지국 이동설인데, 이 설은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마한 세력의 존재를 미처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목지국이 이동하여 내려왔다면 그 세력 자체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였을 터인데, 그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강력한 세력과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기존 마한 세력을 지배하는 정치 세력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1999년 이 주장이 교과서에 실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상으로 1999년 당시 국정 교과서 체제에서 서술된 마한 관련 내용의 특징을 살펴보았으나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분량 면에서는 꽤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마한 사회의 특성이나 정치적 발달 등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의 발전’ 항목에는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라고 하여 백제 4세기 중반 근고초왕 때 백제의 영역에 전라도 남해안까지 포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6세기 중엽까지 나주 지역에 목지국 세력이 존속되어 있다는 같은 책의 내용과 상호 모순되고 있다. 곧 교과서는 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서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교과서 안에서 서로 충돌되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는 것은 교과서의 서술이 얼마나 엉성하게 이뤄지고 있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4세기 중엽 백제의 전라도 정복설이 1999년 당시에도 여전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국정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의 다양한 역사적 인식형성에 어려움을 준다하여 검정 체제로 교과서가 바뀌어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 때부터다. 검정 교과서라 함은 국가가 교과서 서술의 큰 틀, 곧 준거를 마련하고 각 출판사에서는 그 준거에 입각하여 교과서를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술된 교과서를 국가의 검정, 곧 심사를 받아 통과되면 각 학교에서 해당 교과서를 선정하여 학생들이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술된 교과서가 검정에 통과하지 못할 때는 상당한 투자를 하여 책을 출판한 출판사는 엄청난 물적인 피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각 출판사에서는 교과서 서술에 위험 부담이 있어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교과서 서술이 기존 교과서를 답습하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지난 7월 7일(금)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열린 ‘역사교과서 내 마한사 서술 확대를 위한 세미나’는 교과서에 마한 역사의 서술 비중을 확대하고자 하는 최초의 본격적 학술 세미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이 세미나는 교과서 집필자들이 발표와 토론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본 세미나에서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조급증은 필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세미나를 통해 마한사의 서술을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장(場)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뜻깊은 세미나를 선뜻 마련해 준 우승희 군수·강찬원 군의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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