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창 옥

  학산면 묵동리生
  전 광주시 동구청 도시국장
  전 조선대 보건대학원 겸임교수

지난 7월3일 나주 동신대학교 뒤에 소재한 정렬사(旌烈祠)을 찾았다. 이날은 문열공(文烈公) 김천일 선생 창의 431주년 추모 제향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창의사(倡義使) 칭호와 순절하신 이후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받으신 선생의 호국충절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제향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선생은 1537년 1월 10일 나주 흥룡동에서 출생하여 1573년(36세) 공직을 시작하여 임실 현감, 강원·경상도 도사, 순창군수, 담양·수원 부사, 한성부 서윤, 군자 감정을 지냈다. 선생은 1592년 5월 16일(55세)에 창의 기병하여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순절하였다.

선생이 태어날 때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이 사흘 동안 울었다고 한다. 출생한 다음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후 외조모의 돌봄으로 성장하여 13세 때 계부(季父)인 참봉 김신침에게 처음으로 글을 배웠다.

19세 때 이항 선생 문하에서 수업한 후 37세 때 학행이 뛰어난 은일(隱逸)로 뽑혀 군기사주부를 첫 벼슬로 용안 현감 강원·경상도 도사, 순창군수, 담양 부사를 지내고 50세 때 나주로 돌아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53세 때 한성부 서윤으로 다시 임용되고 군자 감정에 이어 수원 부사가 되어 세금을 내지 않던 귀족들의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였다가 그들의 모함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나주로 낙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께서 의주로 파천(播遷)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6월 6일 도성 수복에 뜻을 같이하는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6월 13일 천안에 당도하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 되었다. 수원 독성산성을 검거한 후 금령의 왜군을 무찔러 15급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고 왜군의 앞잡이가 된 자들을 잡아들여 처벌하니 패전 후 극도로 혼란에 빠졌던 경기도의 민심이 진정되고 그 성세가 크게 떨치니 왜군들이 쉽사리 범접하지 못하였다.

이후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부사 윤담과 더불어 성채와 전함을 보수하여 의주와 한강 이남 지역 간의 통신로를 확보하고 있을 때. 선조 임금께서 장예원판결사 관직과 창의사 칭호를 내렸다.

그는 2천여 명의 병력으로 장단의 왜군을 공격하였다가 패전한 후 유격전술로 한강 연안에 있는 왜군을 기습해서 400여 급을 베니 양천, 김포, 등지의 왜군이 놀라 도망쳐 갔다.

그해 겨울, 전라병사 최원 등과 함께 40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양화진에 진을 치고 우리 백성을 일깨우는 방문(榜文)을 붙이며 도전하였고, 1593년 1월 14일부터 충청수사 정걸, 경기수사 이빈과 함께 양화진에 나아가 왜군을 고립시키고 무찌르며 꾸준히 도전하였다.

4월 19일 왜군이 도성을 비우고 퇴각한 맨 먼저 소실된 종묘(宗廟)와 선릉(성종) 정릉(중종)을 봉심(奉審)한 후 식량 1천여 석을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나라의 근본이었던 호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진주성에서 최경회 등 장수들이 거느린 3천여 명의 병력으로 10만 왜군과 맞서 100여 회의 처절한 공방전을 펴다가 큰 비로 성벽이 무너지고 무기도 떨어져 6월 29일 성이 함락되면서 6만 군관민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니, 선생의 나이 56세였다.

1603년(선조36)부터 1745(영조21)까지 7차에 걸쳐 선무원종 일등공신 훈작, 대광보국 승록대부 영의정의 증직, 문열공 시호, 충신 정려와 부조묘의 은전이 내려졌다. 이후 1607년(선조40)에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현액이 하사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훌륭한 조상의 얼을 되새기면서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북핵 문제로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욱 많은 충신열사가 나와서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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