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60] 검정 교과서의 마한사 서술 확대 논의(상)

필자는 지난 6월 27일 강진 유림회관에서 전남 서남부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참석자 대부분이 70대 이상 어르신들이지만 100여 명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필자의 낯선 주제 강의를 흥미롭게 강의 시간 내내 집중하였다. 바야흐로, 인문학이 계층과 시대를 넘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가 형성되어야 ‘직관’할 수 있고, 핵심을 찾아 ‘설명’할 수 있는 ‘용기’가 길러진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고의 토대는 학교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학교 교육이 중요한 까닭이다. 특히 역사교육은 인문학적 사고력 형성에도 중요할 뿐 아니라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토대라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학교에서 역사수업은 주로 교과서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는 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의식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교육의 현실이 자세히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한반도 고대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마한사의 교과서 서술의 실태를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이미 본란을 통해 2020년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시 마한사의 비중은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4세기 중반 백제의 영역에 전라도가 포함되었다는 주장 또한 변함이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마한사 교과서의 서술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물론이고 공무원 시험에도 영향을 미쳐 마한사 실체를 왜곡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4세기 중반에 백제가 마한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교과서의 서술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4세기 중반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는 이병도의 학설을 보다 체계적으로 비판하여야 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교과서 집필 과정에 기원전 2, 3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약 800년간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서술이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마한사에 대한 인식 새롭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마한역사연구회는 영암군과 (재)한국자치경제연구원의 후원으로 7월 7일 ‘검정 교과서의 마한사 서술 확대방안’이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준비했다. 이 세미나에는 기왕에 한국 고대사 부분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또는 현재 집필 중에 있는 전문가들이 발표자 및 토론자로 참여했다. 세미나를 통해 연구자들이 마한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교과서에 마한사 서술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왕에 살핀 바 있는 마한사의 교과서 서술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시기별 교과서에 나타난 마한 관련 서술을 일별(一瞥)하고자 한다. 국정교과서 체제였던 1999년도 한국사 교과서와 첫 검인정 교과서 체제였던 2009 교육과정, 그리고 역시 검인정 교과서 체제로 올해 시작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서술 등을 다루어 각 서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7차 교육과정(국정교과서 체제, 1999)

<삼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천~5천 호, 작은 나라는 6백∼7백 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마한 목지국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직산⋅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주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칭하던 국가 단계의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안 지역에 근거를 둔 초기 마한은 4세기 후반, 그리고 나주의 마한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마한의 바탕 위에서 성장한 백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삼국의 발전>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상이 1999년 교과서의 서술이다. 비교적 삼한 부분이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때는 최몽룡 교수가 고대사 집필자로 들어가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집필자가 누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준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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