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9] 견훤과 왕건의 각축장이 된 마한 왕국 자미산성(하)

견훤과 왕건의 각축장이 된 마한 왕도()
견훤과 왕건의 각축장이 된 마한 왕도(王都) 자미산성 너머 멀리 월출산이 보인다. 지금은 비록 넓은 평야로 변했으나 그 옛날 넓은 바다였던 이곳에서 견훤과 왕건이 치열하게 벌였던 해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견훤의 세력 기반, 영산강 유역 

7년 넘게 광주(무진주)에 머무르며 반남, 나주, 광주 등 내륙 정치 세력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견훤은, 무진주에서 국가를 세우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완산주(전주)로 이동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그곳에서 개국을 선언할 때 한 연설이 흥미롭다.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해보면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세(박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辰)·변(卞)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총장년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선병(船兵) 13만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의 김유신도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기까지 휩쓸어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지금 내가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어찌 의자왕의 숙분을 씻지 아니하랴.”(삼국사기, 견훤전)

견훤이 마한-백제 계승의 역사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신라말 대학자인 최치원이 마한-백제 중심의 역사 인식을 마한-고구려로 바꾸려 하였는데, 이는 신라말까지 이어진 마한-백제 역사 인식을 바꾸려는 신라 정부의 고육책이었다. 영산강 유역이 견훤의 세력 기반이라는 것은 ‘수달’로 알려진 심복 능창을 통해 알 수 있다. 

“(전략) 드디어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적의 국경에 간첩을 놓았다. 이때 압해현에 있던 적장 능창은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고 불렸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의 작은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여 태조가 올 때를 엿보아 해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능창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적의 무리가 비록 적지만 만약 힘과 세력을 합쳐서 우리의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헤엄을 잘 치는 자 10여 명을 시켜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가볍고 작은 배를 타고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왕래하면서 일을 꾸미는 적을 사로잡아서 그 꾀를 저지시켜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가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잡아 보니, 바로 능창이므로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어 목을 베었다. 궁예가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임명하고 불러 들였다.“(고려사절요. 태조 원년)

그런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 중심지에 자리 잡은 반남·나주 정치 세력이 무조건 견훤 지지세력은 아니었다. 다음을 보자. 

반남 중심의 마한 세력, 견훤과 갈등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계에 이르러 금성군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리고 금성을 나주라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고려사. 태조 세가 천복3년)라는 기록이 주목된다. 903년 나주 일대가 후고구려(왕건)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려준다. 이보다 2년 앞서 901년의 다음의 사료를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후백제왕 견훤이 금성의 남쪽으로 군대를 옮기어 그 연변 부락을 약탈하여 돌아갔다.”(삼국사기. 효공왕 5년)

901년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 바로 다음 해 견훤이 나주 남쪽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901년이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막 건국했을 때의 일이고 아직 왕건이 나주 지역에 내려오기 2년 전의 일이다. 금성 남쪽이면 반남 일대를 말하는 데 아직 이 지역이 왕건의 수중에 들어갈 때가 아니다. 그러나 “연변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견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수중에 넣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처럼 반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옛 마한 세력이 견훤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띠자 왕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다. 

견훤이 처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때 광주지역 호족의 딸과 혼인하며 강한 유대감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그가 마한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남 등 마한 핵심 세력들은 이질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견훤은 전주에 이동하여 백제의 정체성과 더불어 마한의 정체성 계승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진주를 떠나 그것도 백제를 끌어들이며 마한 정체성을 강조하려 한 견훤의 태도는 반남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한편 반남 세력과 달리 나주 세력은 왕건이 지휘하는 궁예정권 쪽으로 기울었다. 이는 왕건의 군사적 압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주 지역의 정치적 향배가 작동한 것이다. 곧 나주 정치 세력들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담보할 세력으로 왕건을 주목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조) 

“(정도전이 말하기를)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는데 우리 태조(왕건)가 삼한을 통일할 때 군(郡)·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 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한 것이다.”라 하여 나주 사람들이 스스로 왕건에게 귀부한 사실을 강조한 것도 어느 정도 당시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왕건의 승리로 끝난 전투

여하튼, 나주 지역의 상실은 견훤에게는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를 잃게 됨과 동시에 배후에 적을 두게 되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반대로 궁예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에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확실한 거점으로 키우려 하였다. 견훤이나 궁예 모두 영산강 유역에 대한 해상 지배권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전장터의 중심지가 덕진포·남해포 일대의 영산강 유역이었다.     

이때 전황을 보면 왕건은 영암·진도 등 영산강 남쪽이었고, 견훤은 영광·무안 등 영산강 이북에 있었다. 견훤은 자미산성 정상에 지휘부를 설치하여 전투를 지휘하였다. 자미산성에서 바라다보면 월출산이 지척에 있다. 자미산성과 월출산 사이에는 필자가 ‘영산 지중해’라 부르는 넓은 바다가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두 세력의 치열한 해전은 화공작전을 구사한 왕건의 승리로 끝났다. 자미산성이라는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전투를 지휘한 견훤은, 그의 군대가 격멸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12일 전북일보 취재팀과 산성에 올랐을 때, 지금은 비록 넓은 평야로 변하였으나 그 옛날 넓은 바다였던 이곳에서 전개된 치열한 해전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었다. 자미산성은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여건이기는 하나, 평야 한복판에 있어 오히려 포위되기도 쉬운 곳이었다. 해전에서 패배한 견훤은 포위되는 것을 우려하여 금성산으로 옮겨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견훤의 자미산성 주둔은 단기간에 그쳤음을 고고학적 유적은 설명하고 있다.

마한 왕도(王都)로서의 자존심과 토착성이 뿌리내려져 있는 반남·시종 지역은 견훤이든 왕건이든 어느 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채 때로는 협력과 견제를 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두 세력 쟁탈전의 중심에 놓였고, 고려 시대에 들어 반남은 오히려 군에서 현으로 격하되는 처지가 되었다. 반면 나주는 왕건에게 정치적 미래를 담보함으로써 고려 왕조에 ‘어향(御鄕)’의 지위를 누렸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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