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재*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 *전 광주시교육청장학사​​​​​​​*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신중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
 *전 광주시교육청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작년, 단풍이 물들 때, 죽림정사에서 신가(慎家) 후손들이 함께 모여 시제를 모셨다. 이곳은 영암읍 동쪽 활성산에 위치한 한석봉(韓石峯)의 서당으로 스승은 신희남(慎喜男)이었다. 선조의 흔적만을 남긴 쓰러져 갈 것 같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허름한 기와집의 찌그러진 마룻바닥 위에 상을 차리고 과일과 술을 올리니 정말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직장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참례하지 못하고 오랜만에 찾은 불효한 세손을 혼령들은 반기며 피운 향과 올린 술인들 마음껏 흠향하셨을지 궁금하다.

이곳을 찾으니 한호(韓濩) 석봉이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배운 것처럼 석봉은 아홉 살 때, 어머니 곁을 떠난 지 3년이 지나 그의 스승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떠났던 어느 날, 30리 달빛 따라 밤길을 더듬어 그리운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어머니와 ‘떡 썰기, 붓글씨 쓰기’실력 겨루기에서 패한 석봉은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가슴에 안고, 영암 구림 아천 포구에서 이곳 죽림정사로 돌아온다. 금방 호랑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무섭고 적막한 산골짜기에서 여우 울음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다시 피나는 각오와 노력으로 정진하여 어머니의 노고를 헛되지 않게 했다는 내용은 독자들도 익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석봉은 13세 때, 한성부 서법 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그 기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5세 때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자관(寫字官 외교 관계의 문서를 정리하는 벼슬)이 되었다고 하니 대단한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다. 한편, 독자적인‘석봉체’를 창조하기도 했다. 중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 명필로 그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선조 대왕은 그의 글씨를 보고 평하기를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裡乾坤 筆奪造化 하늘과 땅이 취한 가운데 붓 재주가 조화를 이룬다)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왕세정(王世貞) 필담(筆談)에는 “석봉의 글씨는 성난 암고래가 돌을 깨뜨리고, 목마른 준마가 샘을 향해 달리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 

야담집에 석봉이 박연폭포 아래에서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바위에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때, 그 연못 속에 이무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여의주를 얻어 승천할 즈음이었으나 석봉이 글씨 쓰다 남긴 먹물이 연못 속의 물을 흐리게 하여 승천하지 못하니 이무기는 석봉에게 하루 동안만 글을 쓰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석봉이 거절하자 붓에 조화를 부려 신필이 되게 해준 후, 승천했단다. 하산한 석봉은 신필(神筆)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하루도 쉬지 않고 얼마나 부지런히 붓글씨 공부를 하였으며, 글씨가 얼마나 신비로웠으면 그런 전설까지 생긴 것일까

어느 날, 석봉이 길을 가는데 어떤 누각에 사는 기름 장수에게 기름을 사러 온 꼬마가 있었다고 한다. "꼬마야, 호리병을 내려 놓으렴.” 보지도 않고 전혀 흘림 없이 기름을 호리병에 붓고, 꼬마가 던진 엽전도 손으로 받는 것을 본 석봉은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라며 몇 년간 더 붓글씨 공부에 정진한 뒤, 다시 그 누각에 꼬마가 기름을 사러 온 것을 보게 되었는데, ‘손으로 기름을 붓겠지'. 했지만, 기름장수는 발로 기름을 붓고, 엽전도 발로 받는 것을 보고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다시 공부에 열심히 했다니,

또한, 야사에는 중국에서 문사로 유명한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와서 함께 글을 써보며 연회를 즐기었는데, 그가 글자 100개를 보여주고 이 글자로 운을 맞춰 하룻밤 안에 시를 써 보라고 말하니, 당시 관료들이 엄두가 나질 않아 우려하고 있을 때, 차천로(車天輅)가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술 한 동이, 글을 쓸 병풍, 석봉이 글을 쓸 것’을 주문하였고, 그는 술 한 동이를 마시면서 즉석에서 시를 읊어 석봉이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고 한다. 다음 날 사신이 이때 석봉이 쓴 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어 석봉이 책 한 권을 필사해 주었다고 한다. 석봉은 그 공로로 왜란 후 가평군수가 되었지만, 글씨 쓰는 것과 지방 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에 어려움이 생겨 탄핵을 당해 통천 현감으로 좌천된 후, 파직당해 6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명나라의 주지번은 "왕희지, 안진경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했을 만큼 호평했으나 지나칠 정도로 석봉의 글씨는 정석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술성이 좀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씨체는 국가 문서의 표준 서체를 확립했으며, 컴퓨터나 교과서에서 쓰이는 현대 서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남겨진 글씨로는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도산서원 현판, 영암 군서 구림 육우당의 상량문에 박흡(朴洽) 장군을 기리는 정자 액자 글씨를 비롯해 영보정(永保亭)의 현판 글씨를 쳐다보면, 우람한 필치가 살아서 용솟음 치는 듯하고, 한편으로는 한석봉을 만난 듯 반갑고 다정하다.

석봉의 스승 영계공(瀯溪公) 신희남은 1555년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 승지에 올랐으며, 1576년 강원 관찰사를 지내다가 금산군수를 한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 이우당(二友堂 신씨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돌아와 죽림정사에서 석봉을 가르쳤던 같다. 

석봉의 스승, 영계공 신희남과 필자와의 인연은 같은 신씨 계보의 참판공파로 나의 15대조이며, 그의 증조부 신후경(慎後慶)이 연촌(煙寸) 최덕지(崔德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영암 영보에 거창 신씨와 전주 최씨(崔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는데, 필자의 외가가 전주 최씨이기도 하다. 한편, 공과 필자는 노송리 송내·송외 앞뒤 마을이었으며, 남쪽의 월출산 ‘문필봉(文筆峯)’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서예 공부를 20여 년, 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서예가로서 선조의 소질을 이어받은 것은 아닐까? 외손녀도 올해에 한국화 대학원에 입학한 걸 보면? 또한, 필자가 40여 년 간을 교직에 몸담았기에 한석봉 같은 제자는 없을지 몰라도 나의 제자들도 어느 곳에선가 나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빛을 발하며 사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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