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배
*덕진면 노송리출생
*전 초등학교장
*전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수원지방법원 조정위원

아침 6시면 집 인근의 작은 산에 오른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는 안중근의 독서열처럼, 난 하루라도 산엘 다녀오지 않는 날이면 뭔가 큰일 하나를 놓쳐버린 듯 괜히 아쉽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전날 마무리해야 하는 일 때문에, 늦게서야 잠을 자야 했기에 아침 11시가 넘어서야 산으로 향했다. 무더운 6월의 열기 때문인지 역시 한 낮이 되어가니 사람들이 없었다. 그다지 높지 않는 산의 정상에 올라 언제나처럼 나무 벤치의 한쪽에 앉았다. 이미 어떤 여자 한 분이 다른 한쪽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은 커다란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허리는 반쯤 구부린 채로 앉아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힐끗 봐도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훔쳐내는 모습이 혹시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냥 일어설 수 없었다. 어디가 불편하시냐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석 달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했다. 얼마나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그리도 잊지 못해 섭섭하시겠느냐며 저세상으로 간 남편분이 참으로 기뻐하실 거라며 위로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남편 살아생전 자기가 잘 못 한 것들이 많아서 떠나고 나니 한이 되어 그런다 했다. 흥분하지 않으면서 차분히 조리 있게 하나씩 털어놓은 노인네의 사연을 여기에 다 옮겨 적기는 두렵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시어머니의 갖은 수난에도 남편이란 사람은 자기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빨랫방망이와 발길질로 허리에 금이 가도 병원 한번 가지 못하였다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새벽에 나가 해가 지고 밤하늘 별을 보며 들어오는 논밭 일을 혼자서 다 했는데, 차라리 집을 나가 일하는 것이 마음은 너무 편했단다. 도박으로 마지막 남아있던 천수답마저 없애고부터는 날이면 날마다 술에 젖어 리어커에 실려 온 날이 이틀 걸러 하루라 했다. 입만 뻥긋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수며 날뛰는 광폭에 자식들마저 아빠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오금을 저리는 성장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라고 시집간 딸이 원룸 하나 마련해 주어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되었단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그대로 눌러앉아 살았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천성이 너무 착해 보여 감히 이혼이나 집을 뛰쳐나올 만한 용기가 아예 없어 보였다. 

그러다 기회가 왔단다. 남편이 3년 전에 폐암 말기로 입원을 했는데, 어찌나 보기가 싫고 아니 이 기회에 차라리 빨리 죽게 해달라고 새벽이면 물까지 떠 놓고 빌었단다. 방문 앞에 있는 남편의 신발들마저도 보기 싫어서 마을 뒷산으로 가져가 멀리 던져버리고 오던 길에 항상 막혀있던 콧속이 뻥 뚫리더라면서 순간 웃기도 했다. 거의 임종이 가까울 무렵에서도 남편 옆에 있기가 싫어서 병원 밖에서만 서성거렸고, 어쩌다 남편 옆에 있어야 할 때면 남편 허벅지를 마구 쥐어뜯으면서 어서 떠나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고 되뇌었단다. 그러다 그토록 미웠던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고 나서 온 방 안을 훨훨 날아다니던 한 달여쯤에 남편이 쓰던 방안의 모든 것들을 처리하려고 정리를 하다 책장의 서랍 귀퉁이에서 몇 장의 종이를 보았단다. 매일 쓴 것 같진 않았지만, 아마 암 선고를 받고 이젠 정리할 때라고 생각되었던지 주로 아내에 대한 글이 많더란다. 결혼 초부터 입원 직전까지 그토록 몹쓸 짓을 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후회와 반성하는 글들이 너무도 소상하게 기록되었는데, 이제서야 웬 지랄인가 하다가 마지막 글 한 줄에서 그만 숨이 턱 막히면서 온 몸의 힘이 빠지더란다. 

“여보! 다음 생엔 나 말고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아. 오랜 세월 미안했어. 정말이야. 이제야 후회가 되네. 저세상에서도 빌고 또 빌게”
남편은 자주 이 산을 다녔는데 언젠가 정상에 의자가 하나 있다면서 거기에 앉아 쉬었다 온다는 말이 생각나, 오늘 남편 간지 백일째 되는 날이어서 처음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토록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미워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없으면 좋겠다고만 염원했던 남편인데, 막상 이제는 정말 옆에 없다는 사실이 실감 되면서, 지난날 온통 미움과 저주로만 대했던 자신이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남편인들 마음이 편했겠느냐며, 자기인들 어찌 잘못한 게 없었겠느냐며 자리를 뜨면서도 훌쩍거렸다. 

후회! 세상사 사람 사는 곳에 후회 아닌 것이 있을까? 

한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가장 후회되는 게 뭐냐는 설문에 “세상을 너무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사느라 내 인생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라 했단다. 자기 삶이 아니었다는 회한일 것이다.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후회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고향을 떠나 살아온 일”이다. 타지에서 그토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며 바친 열정으로 이루어낸 성취들을, 내 고향 영암을 위해 학교를 경영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일에 바쳤더라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찬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면 후회되는 마음 크다. 나이 들어 가끔 고향엘 들를라치면 눈에 익은 들판과 벼들이 익어가는 소리, 볼수록 힘이 솟는 월출산, 사람 사는 정이 흐르는 마을과 사람들이 너무 포근하다.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남은 삶을 더 여유롭게 즐기면서 사람들과 교감하고 이런저런 소망스런 일도 하면서 보람 있는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후회로 남는다.

아마 고향 떠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후회는 언제나 뒤에 오는 것. 부부지간에도 죽고 나서야 “왜 그리도 싸우고만 살았을까?” “등 한번 다독거리면서 고생한다 한마디 하지 못했을까?”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리지 못한 자신을 뉘우치는 자식들도 매한가지다. 

때늦은 후회지만 교훈으로 삼아 더 성숙한 길을 열어가는 지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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